'0도의 나라, 부에노스 아이레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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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엔딩 장면, 영화 속 '왕가위' 감독이 나직이 읊조린다. "0도의 나라! 동쪽도 서쪽도 아닌, 낮도 밤도 없는, 춥지도 덥지도 않은 곳. 나는 그 곳에서 유배의 느낌을 경험했다." 여기서 '0도의 나라'는 홍콩에서 볼 때 지구 반대편에 있는 나라 '부에노스 아이레스'를 가리킨다. 그리고 이 영화를 보면 왕가위가 느낀 유배의 느낌을 알 수 있게 된다. 또한 제목을〈부에노스 아이레스 제로 디그리〉로 정하게 된 까닭을 알게 되는 대목이다.

영화〈부에노스 아이레스 제로 디그리〉는 왕가위 감독이 연출한 작품이 아니다. 홍콩의 두 젊은 감독 관 풍령과 아모스 리가 만든 왕가위 감독의 영화 〈해피투게더〉의 메이킹 필름이다.

영화를 제작한 감독, 참여한 스탭, 연기한 배우를 인터뷰하고 그들의 관점에서 아르헨티나라는 먼 타국에서 느끼고 체험한 각자의 사연을 담아가는 다큐멘터리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인터뷰 장면과 영화〈해피투게더〉의 장면들이 절묘하게 모자이크 되어 있고, 특히 실제 영화에서 볼 수 없었던 서정적이고 드라마틱한 장면들과 새롭게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담아 온 화면들이 왕가위 특유의 영화음악과 함께 생명력을 얻었다. 영화 한 편 자체가 뮤직비디오라고 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

영화를 보기 전에는 실제 영화 속에 나오지 않은 장면들에 대해 많은 기대를 했다. 실제로 영화 속에서 볼 수 없던 '관숙의'라는 여배우가 등장하는 등 편집과정에서 아깝게 버려질 수 밖에 없던 장면들이 나온다. 그러나 영화를 다 보고 난 후, 어떤 새로운 장면들이 있었던가 하는 관찰은 무의미해지고 한 편의 새로운 왕가위 감독의 작품을 보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그것은 아마도 왕가위 감독이 아끼는 두 명의 젊은 감독이 영화를 만들었기 때문이리라.

그래도 이전에 이미 영화 〈해피투게더〉를 본 관객들에게는 중간중간 이전 필름의 스토리를 회상하며 새로운 장면을 찾아내는 즐거움을 맛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강렬한 카리스마의 개성을 지닌 두 주인공, 양조위, 장국영이 탱고를 추는 장면과 장대한 이구아수 폭포의 장면은 여전히 인상 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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