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송호근 칼럼

바보 투표, 유령 공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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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

페르시아와 아프리카에는 낙타를 쓰러뜨리고 마을 전체를 파묻어버리는 괴력의 모래폭풍이 자주 출몰한다. 시커먼 흙먼지를 싣고 사하라를 건너는 ‘하르마탄’에 대항하다가 몰살된 군대가 있었다. 페르시아의 어느 성질 급한 왕은 왕국을 괴롭히는 사악한 바람에 너무도 격노해 군대를 끌고 전투대열로 돌진하다가 순식간에 생매장됐다. 시뻘건 진흙폭풍이 사막과 군대를 통째로 집어삼켜 마치 하늘에서 피가 쏟아지는 듯했다. 그리스 사학자 헤로도토스의 기록을 소설가 ‘온 다체’가 『잉글리시 페이션트』에서 묘사한 대목이다.

 주민투표에 그의 무력을 올인해 순식간에 전사하고야 만 오세훈 시장의 행보를 보면서 맨 처음 떠올린 장면이 이것이다. 무상급식은 모래폭풍일지 모른다. 사막에 사는 베두인족은 습기를 몰고 오는 하르마탄을 유혹하려고 며칠 동안 금식기도를 올린다. 궁정에 사는 왕족에게 그 바람은 여간 성가신 존재가 아니다. 그런데 군대를 동원해 몰살당할 것까지야. 정치권과 유권자들이 그나마 신경을 쓰는 재·보선에서도 투표율 30%를 돌파하기 힘들거늘 장마와 수마에 지친 여름 끝자락에서 그것도 평일에, 격노한 시민들이 투표장에 몰려들어 개함 기준을 살짝 넘겨준다고 기대했다면 그는 정치인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게 어디 자리를 걸 만한 사안이었던가? 안 그래도 선거에 지친 마당에, 또 보궐선거 짐을 안겨야 했을까?

 이번의 주민투표는 여러모로 ‘바보투표’다. 정치권이 타협할 책임을 주민들에게 미룬 것은 직무유기에 해당한다. 좋다, 그걸 봐주더라도, 1안과 2안은 과(科)가 다를 뿐 무상급식 변종들이다. 제목도 ‘무상급식 지원범위’여서 동일 종(種)에 속한다. 헷갈리는 것은 2안이 민주당 원안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정확히 표현해 민주당 원안은 ‘단계적 무상급식’인데, 발의과정에서 ‘전면적’으로 명찰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민주당이 ‘나쁜 투표’라고 물고 늘어졌고, 결국 투표거부로 맞섰다. 직무유기, 변종 중 택일, 명찰 바꾸기, 이 세 가지 물감이 덧칠된 어물전에서 제사상에 올릴 진짜 국산 조기를 골라보라는 ‘바보투표’가 세상에 있을까 싶다.

 그래도 참을성 있는 유권자들은 결재도장을 꾹꾹 눌렀다. 페이퍼 스톤(종이 돌)의 위력을 맛보라는 민주적 공중의 눈물겨운 참여였다. 그런데 청소년 미래를 책임진 교육감은 청소년정책이 의제인 투표에 정치적 불참을 택했다. 그는 평범한 유권자가 아니라 2안의 상징인물이며 주민투표를 발의케 한 당사자다. 그런 마당에 ‘나쁜 투표에 착한 거부를 했다’고 냉소적 코멘트를 날렸다. 교육감은 정치인이기 전에 교육의 수장이다. 청소년들에게 민주주의의 꽃인 투표를 거부하는 일탈적 모습을 몸소 보여줄 때 거리낌은 없었는가? 그런데 지난 교육감 선거에서 2억원을 선의로 건네주었다니 그건 ‘좋은 투표’였을까.

 투표함이 개함 기준을 넘지 못한 사실을 두고 좌충우돌하는 정치권도 꼴불견이긴 마찬가지다. 정치권이 제일 먼저 발할 말은 ‘쓸데없이 돈 쓰고 힘 쓰게 해서 죄송합니다!’여야 했다. 그런데 민주당은 ‘보편적 복지가 시대정신이자 민심’이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이제 흩어진 전열을 가다듬어 서울을 접수하고 청와대로 진격할 일만 남은 듯 흥분했다. 한나라당의 아전인수도 이에 못지않았다. 투표율 25.7%가 모두 찬성표일 거라는 희망적 사고를 진실로 둔갑시켜 이만하면 패전은 아니라고 방어벽을 쳤다. 한국에서나 일어날 저급 코미디다.

 25.7% 표심의 향방을 누구도 모르거니와, 비참가자 74.3%를 모두 무상급식 찬성론자로 몰고 가는 것만큼 유권자를 우롱하는 처사는 없다. 참가자가 사명감 있는 민주적 공중이듯, 비참가자들도 심사가 매우 복잡한 비판적 공중이다. 바보투표 혐오형, 유상급식 같은 이종(異種)이 없어 포기한 위임형, 공개투표 기피형, 적극적 거부형 등 다양하다. 정치권이 강요한 저 바보투표는 참을성 있는 민주적 공중의 눈물겨운 표심도 확인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심사가 복잡한 비참가자들에게 ‘착한 거부’ 훈장을 수여함으로써 600만 명에 달하는 시민을 ‘유령 공중’으로 만들었다. 정치권의 깨춤과 이기적 독심(讀心)에 의해 서울시민 600만 명이 졸지에 얼굴 없는 공중, 허깨비 공중으로 변한 것이다. 두 달 뒤 시장 보선에서 그들은 유령 공중에게 표를 구걸할 것이다. 그래서 불쾌하다. 모래바람 속에 사라진 시장의 결연한 사퇴보다 더 어이가 없다. 1975년 필자가 처음 경험한 유신찬반 투표가 공포 그 자체였다면, 2011년 주민투표에는 바보가 될 수밖에 없었고, 다음 날에는 피에로가 되었다. 보편적 복지의 핵심은 4대 보험인 연금·의료·고용·산재보험이다. 시민권의 요건인 4대 보험에서 제외된 ‘비시민(非市民) 부모’가 줄잡아 1000만 명을 헤아리는 마당에 자녀복지에 올인하는 정치적 발상은 무엇을 겨냥하고 있는가?

송호근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