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족 스프린터 “오랜 목표 이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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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레이드 러너’ 피스토리우스

“나는 내가 개척자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지금의 순간들이 매우 영광스럽다. 아직 젊기에 더 많은 이야기를 역사에 남기고 싶다.”

 ‘블레이드 러너’ 오스카 피스토리우스(24·남아프리카공화국)가 대구 세계육상선수권에서 커다란 감동을 안겨줬다. 장애 선수로는 첫 세계선수권 출전의 역사를 남긴 피스토리우스는 남자 400m에서 준결승에 진출하는 이정표도 세웠다.

 28일 오전에 열린 남자 400m 예선 5조, 대구 스타디움 8번 레인에 두 다리에 의족을 낀 피스토리우스가 등장하자 관중은 ‘오스카’를 연호했다. 카메라 플래시는 그를 향해 폭죽처럼 터졌다.

 피스토리우스는 경쟁자들보다 한참 느린 0.212초에 스타트 블록을 치고 나갔다. 초반에는 하위권이었으나 중반으로 가면서 속도를 냈고 결승선 50m를 남기고 3~4명과 치열한 스퍼트 경합 끝에 3위로 골인했다. 피스토리우스의 준결승 진출 결과가 발표되자, 관중은 ‘오스카’를 연호하며 뜨거운 박수갈채를 보냈다.

 피스토리우스는 공동취재구역에서 “여기까지 오는 게 오랜 목표였다. 여기에서 뛰려고 엄청나게 노력했다. 참으로 경이로운 순간이라고 생각한다”고 들뜬 목소리로 소감을 말했다. 그는 “출발이 늦었으나 190m쯤에서 안정을 찾았다. 두 번째 코너를 돌면서 다른 선수들이 속도를 늦춰 자신감을 얻었고 40m를 남기고 옆에 세 명 정도가 있어 내가 잘 뛰고 있다는 걸 알았다”고 레이스를 설명했다.

 남자 400m 준결승은 29일 오후 8시에 열린다. 피스토리우스는 “준결승이 더 힘들 것이다. 내일도 오늘처럼만 뛸 수 있었으면 좋겠다”며 “내가 아무리 잘 뛰어도 결승에는 못 올라갈 것”이라며 현실적인 전망을 내놨다. 그는 14위로 24명이 겨루는 준결승에 진출했다.

 ‘블라인드 러너’ 제이슨 스미스(24·아일랜드)도 하루 전 남자 100m에서 감동의 레이스를 펼쳤다. 정상인의 10%도 안 되는 시력을 청력과 운동신경으로 극복해 온 스미스는 남자 100m 1라운드에서 10초57을 기록, 조 5위에 그치면서 탈락했다. 8번 레인에서 출발한 그는 뒤뚱거리거나 옆 레인을 침범하지 않고 똑바로 달려 장애의 흔적을 느낄 수 없었다. 스미스는 경기 후 “최고의 선수들과 경쟁하고자 대구에 왔는데 더 좋은 기록을 냈어야 했다”며 아쉬워했다. 그는 “세계선수권대회에서 경쟁하면서 좋은 경험을 쌓았다”며 다음 도전을 기약했다.

대구=한용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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