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축구 삿포로 대참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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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4면

조광래 감독이 10일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돔에서 열린 한·일전 후반 0-3으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왼손을 이마에 갖다 댄 채 고개를 숙이고 있다. 조 감독은 경기 전 ‘패스 축구로 일본을 이기겠다’고 다짐했다. 그러나 대표팀은 일본의 패스 축구에 참패를 당했다. [삿포로=연합뉴스]


치욕의 역사를 썼다. 악몽 같은 밤이었다.

 한국 축구대표팀이 일본에 완패했다. 한국은 10일 저녁 홋카이도 삿포로돔에서 열린 일본과의 정기전에서 전반 1골, 후반 2골을 내줘 0-3으로 무너졌다. 전반 35분 가가와 신지(도르트문트)에게 첫 골을 내주며 일찌감치 기선을 제압당했다. 후반 7분과 후반 9분에도 혼다 게이스케(CSKA모스크바)와 가가와에게 한 골씩을 더 빼앗겼다. 일본을 상대로 세 골 차 패배를 허용한 건 1974년 도쿄 경기(1-4패) 이후 37년 만의 일이다. 2000년대 들어 이어 온 일본 원정 무패 행진(3승2무)도 6경기 만에 멈췄다.

 유린당했다. 한순간도 주도권을 잡지 못했다. 첫 실점한 뒤에도 반격은커녕 추가 실점이 두려워 전전긍긍했다. 일본이 짜임새 있는 패스워크로 파상공세를 펼친 것과 대조를 이뤘다.

축구 국가대표선수단이 패배 후 응원단에 인사하러 가고 있다. [삿포로=연합뉴스]

 전략부터 잘못됐다. 하루 전 열린 공식 기자회견에서 조광래 감독은 “패싱플레이로 일본을 제압하겠다”고 공언했다. 패스는 일본이 자랑하는 무기다. 일본은 지난 20여 년간 미드필드진을 중심으로 차분히 경기를 조립하는 플레이 스타일을 진화시켜왔다. 지난해 열린 아시안컵에서도 이를 통해 정상에 올랐다. 조 감독의 발언은 상대가 강점으로 내세우는 ‘패스워크 위주의 축구’를 정면승부로 뛰어넘어보겠다는 의도였다.

 만용이었다. 제대로 준비하지 않은 상태에서 자존심만을 내세운 결과는 참혹했다. 스코어뿐만 아니라 경기 내용에서도 일방적으로 밀렸다. 일본은 엔도 야스히토(감바 오사카)를 중심으로 중원 지역에서부터 짜임새 있게 경기를 풀어갔다. 패싱 타이밍은 빨랐고, 볼 키핑력은 뛰어났다. 한국 수비진은 일본의 조직적인 패스를 차단하지 못해 번번이 위험지역을 내줬다. 일찌감치 중원을 점령당한 상황이라 볼을 빼앗은 뒤에도 연결할 곳이 없었다. 롱킥으로 최대한 멀리 보내는 ‘뻥축구’가 불가피했다. 1월 아시안컵 4강전(승부차기 패)에서 저지른 실수를 되풀이했다.

 고질병으로 지적받는 공격진의 결정력 부족 또한 여전했다. 이따금씩 역습 찬스를 잡았지만, 모두 불발탄이 됐다. 후반 15분쯤 김정우(상주)의 크로스를 받은 김신욱(울산)이 헤딩슈팅을 시도했으나 힘없이 골키퍼 정면으로 향했다. 후반 27분 기성용(셀틱)의 패스를 받은 구자철(볼프스부르크)의 헤딩 슈팅도 골 포스트를 빗나갔다. 후반 31분에는 구자철이 상대 골키퍼와 일대일로 맞섰지만 크로스바를 넘겼다. 기회를 놓친 뒤엔 어김 없이 역습을 허용했다. 악순환이었다.

 한국 축구대표팀은 2014 브라질 월드컵을 통해 통산 8회 연속 본선 진출을 노리고 있다. 하지만 실력 없는 자부심만으로는 아무것도 이뤄낼 수 없다는 사실이 이번 경기를 통해 극명히 드러났다. 한·일전은 아시아 무대에서 한국 축구의 위치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아시아 지역 3차 예선을 앞둔 한국 축구에 주어진 시간은 한 달도 남지 않았다. 한국 축구가 절체절명의 위기에 빠졌다.

삿포로=김민규 기자

◆한·일 축구 전적(10일)

한국 0 - 3 일본

득점 가가와 신지(전35분, 후9분) 혼다 게이스케(후7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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