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르노그라피, 구멍, 그리고 작은 죽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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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적 쾌락은 작은 죽음 petite mort이다. 반수면 상태의 꿈꾸기가 작은 죽음이라면 영화보기는 따라서 성적 쾌락의 또 다른 표현일 것이다. 극장의 어둠, 스크린의 망막에 투사되는 꿈의 이미지가 갖는 에로틱한 본성이 여기에 있다. 하지만 꿈이 자기 검열을 갖고 있는 것처럼 영화의 에로티시즘 또한 검열 체계를 갖고 있다.

일반적인 생각과는 달리 검열이 쾌락을 방해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검열이 더더욱 상상력을 자극하기 때문이다. 바쟁은 그래서 마릴린 몬로의 누드 사진보다 〈칠년만의 외출〉에서 지하철의 통풍구 위에서 스커트 밑으로 바람이 들어오게 하는 장면이 더 에로틱하다고 말한다. 할리우드 영화의 에로티시즘을 유지시켜준 것은 역설적으로 검열이었다.

영화의 에로티시즘은 또한 현실적인 공간이 아닌 이미지의 상상적 공간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매혹적인 여성이 무대에서 실제로 벌이는 한 남자와의 섹스는 결코 관객에게 쾌락을 제공하지 못한다. 왜냐하면 병적인 관음증자가 아닌 이상 남자 파트너는 관객의 욕망과 경쟁 관계에 놓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화에서 벌거벗은 여성과 섹스를 하는 상대역의 남성은 관객의 욕망과 경쟁 관계에 놓여지지 않는다. 영화에서 관객은 여성을 정복하는 남자 배우와의 동일화를 통해 대리 만족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근 개봉하는 오시마 나기사의 <감각의 제국〉은 실제 정사를 포르노그라피적인 이미지로 담고 있으면서도 탐닉성을 거부하고자 하는 하나의 시도를 보여주고 있다. 예를 들어 두 장의 스틸 사진에서 흥미로운 것은 보여지는 남녀의 바라보는 관객의 시선이 동일한 프레임 안에 위치한 또 다른 여인의 시선에 의해 굴절되고 있다는 것이다. 섹스를 나누는 남녀와 그 곁에, 즉 프레임의 가장 자리에 마치 섹스라는 사건을 보고 있는 증인처럼 악기를 연주하는 한 여인이 위치하고 장면에서 프레임은 거울처럼 시선을 비추고, 위치를 지정한다. 그렇다면 남녀가 벌이는 공간은 과연 어떤 공간일까? 그리고 관객은 공간에 위치하는 것일까? 이 프레임이 거울이라면 섹스는 비추고 것일까?< p>

그런 점에서 이 영화에서 정사는 포르노그라픽한 이미지의 쾌락을 제공하는 것에 머무르지 않는다. 매끄러운 육체, 침투 불가능한 처녀성, 이미지의 표면에 흠집을 내고 프레임의 가장 자리에 증인을 위치시키는 것은 봉합되지 못하는 구멍, 공백, 상처와 그것의 흔적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다.

p.s: 오시마 나기사의〈감각의 제국〉이 갖는 정치적 함의에 대해서는 Stephen Heath의 『Questions of cinema』(1981)에 실린 「The questions of Oshima」를 참조할 것.

필자 김성욱씨는,중앙대학교 영화학과 석사 졸업하고〈문화학교 서울〉연구소장을 거쳐,현재 공주 영상정보대 출강.〈필름 컬처〉등의 잡지에 정기적으로 영화와 관련한 글을 기고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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