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이덕일의 古今通義 고금통의

백두산 정계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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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7면

숙종 38년(1712) 세운 ‘백두산정계비’는 현재진행형 문제다. 문제의 발단은 당시 조선 대표들의 부적절한 처신에 있었다. 청의 대표는 오랄(烏喇:길림성)총관(總管) 목극등(穆克登)이고, 조선 대표는 접반사(接伴使) 박권(朴權)과 함경도 관찰사 이선부(李善溥)였다.

그런데 조선 대표들은 숙종 38년 5월 숙종에게 “접반사와 도신(道臣:관찰사)이 뒤처질 수 없다는 뜻으로 재삼 굳게 청했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았습니다”고 보고한 것처럼 정계비를 세울 때 백두산에 올라가지도 않았다. 『통문관지(通文館志)』는 중인 출신 역관(譯官) 김지남(金指南)·김경문(金慶門) 부자만이 따라 올라가 “산꼭대기에 올라 손으로 가리켜 구획했다”고 전하고 있다. 그래서 숙종 38년(1712) 6월 사헌부 장령 구만리(具萬里)가 박권·이선부는 ‘몸이 쇠약하고 늙었다는 핑계’로 부하를 보냈다고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렇게 세운 것이 “서쪽은 압록이고 동쪽은 토문이다(西爲鴨綠, 東爲土門)”는 백두산정계비다.

그럼에도 토문(土門)이 어디인가가 논란의 초점이 되었다. 순조 8년(1808) 서용보(徐龍輔) 등이 왕명으로 편찬한 『만기요람(萬機要覽)』 ‘백두산 정계’조는 『여지도(輿地圖)』를 인용하면서 ‘토문강 북쪽에 있는 분계강(分界江)에 정계비를 세우든지, 토문강의 발원지에 세워야 했다’고 적고 있다. 『만기요람』은 또 ‘고려 때 윤관이 속평강(速平江)까지 영토를 확장했으며 그때 세운 비가 남아 있다’고 전한다. 실학자 안정복(安鼎福)은 ‘이가환(李家煥)에게 보낸 편지’에서 ‘두 나라의 경계가 된 분계강(分界江)은 두만강 북쪽 300리’라고 말하고 있다. 『고려사』 예종 3년(1108) 2월조는 “윤관이 여진족을 평정하고…비를 공험진(公嶮鎭)에 세워서 경계로 삼았다”고 전하고 있는데 이곳이 조선과 명·청 사이의 국경선이었다.

『세종실록』 21년 3월 6일자는 세종이 명나라에 국서를 보내 “공험진 이남 철령까지는 그대로 본국 소속”이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세종 때도 두만강 북쪽 700리 지점인 공험진이 두 나라의 국경이었다는 뜻이다. ‘백두산정계비’는 비록 공험진을 명시하지는 못했지만 토문강은 만주에 있는 강이었다. 대한제국 시절 조정에서 간도관리사를 파견해 간도(間島:만주)를 조선 영토로 삼아 관리한 것은 이런 역사적인 연원이 있었다. 모든 분쟁 해결의 출발점은 역사에 있다. 지금도 우리가 역사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덕일 역사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