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수 전문기자의 경제 산책] 미 정치인 가르칠 우리의 ‘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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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8면

김정수
전문기자

어느 나라나 정치인은 다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눈앞의 표(票)를 위해서라면 장차 나라에 해가 되는 일도 서슴지 않는 건 ‘오십보백보’다. 미국 공화당 상원이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심의를 않겠다고 한다. 또 우리 민주당은 비정규직 보호를 강화하겠다고 한다. 그게 무슨 해악이 되냐고 하겠지만, 사정 모르는 소리다.

 미국 사정은 이렇다. 상원에 내건 FTA 안건에는 TAA(무역조정지원) 연장안이 포함되어 있다. TAA는 수입경쟁으로 일자리를 잃게 된 근로자의 재교육 등을 지원하는 제도다. 가뜩이나 재정지출 확대에 극도로 민감한 미 야당으로서는, 재정이 투입되는 TAA를 심의할 수 없다는 게다. 그 자체로는 나랏돈을 더 아껴 쓰라는 것이니 그럴듯하다. 그런데 FTA로 개방을 하면 어려워지는 부문이 생기기 마련이다. TAA를(덩달아 FTA까지) 심의하지 않겠다는 것은 안 그래도 한국 등과의 FTA에 대해 부정적인 민주당에 반대의 빌미를 제공하는 셈이다. 그만큼 한·미 FTA의 비준은 늦어지게 되고, 더불어 미국의 일자리 창출이 늦어질 수밖에 없다.

 여기까지는 ‘그건 미국의 일(자해)’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한·미 FTA 비준이 늦어져 우리의 일자리 창출이 늦어지면 거기서부터는 ‘우리 일(우리에 대한 가해)’이 된다. 우리도 가만히 있을 수 없는 문제인 것이다.

 비정규직 보호 주장도 마찬가지다. 비정규직과 정규직 간의 차별을 없애고, 비정규직의 월급 수준을 정규직에 가깝도록 올리게 하고, 정부의 손이 닿는 공기업 등부터 비정규직을 정규직으로 전환해야 한다는 것이다. 비정규직을 잘 대해주겠다니, 그것만 보면 그럴듯하다.

 문제는, 이 주장대로 가면 그 보호 대상인 비정규직 일자리 자체가 줄어든다는 데에 있다(그렇다고 정규직 일자리가 늘어나는 것도 아니다). 고용된 지 2년이 넘으면 정규직으로 전환해줘야 하는 부담 때문에, 많은 회사가 더 끌어안고 싶어도 어쩔 수 없이 비정규직을 밖으로 내몰고 있다. 게다가, 정규직 임금과 비슷하게 해야 한다는 이유로 비정규직 임금을 강제적으로 올리면, 회사로서는 비정규직 일자리를 만들 이유가 더더욱 없다. 비정규직 문제는 그들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일자리 시장 전체의 문제다.

 미국에서의 FTA 비준 지연과 한국에서의 비정규직 보호 강화는, 일자리 창출을 가로막고 있다는 점에서 둘 간에 차이가 없다. 두 가지 모두, 주로 야당이 주장하고 있는 것을 보면 뭔가 꿍꿍이가 엿보인다. 일단 일자리 창출을 힘들 게 해 여당과 행정부를 곤궁에 빠뜨린 다음, 그것 때문에 높아질 국정에 관한 일반인의 불만을 다가오는 선거에서 그네들이 집권하는 발판으로 삼겠다는 것이 아닌가 싶다. 눈앞의 표를 위해 나라에 해로운 일을 벌이려는 것이다.

 그토록 이들의 눈에 ‘표’밖에 보이지 않는다면, 그들이 주장하는 게 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가르칠 수 있는 건 표밖에 없다.

 지금의 비정규직 근로자, (정규직 자리를 찾을 때까지) 비정규직 일자리라도 얻으려 하는 실업자, 그리고 일자리를 구하러 수십 군데의 회사 문을 두드리며 돌아다니는 딸·아들을 안쓰럽게 지켜봐야 하는 부모들이 이제 ‘표’로 목소리를 내야 한다. 총선에서건, 대선에서건 내일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 비정규직을 포함한 전체 노동시장의 유연화를 당당히 주장하는 정치인에게 표를 던져야 한다. 결국은 정규직(노조)만 이로운, 비정규직 보호를 주장하는 정치인을 가르쳐야 한다.

 미국 정치인을 가르칠 우리의 ‘표’는 수입품 선택권이다. 우리 소비자가 (예전부터 경쟁력이 시원치 않았지만) 한·EU(유럽연합) FTA 때문에 더욱 경쟁력이 없어질 미국 상품 대신 EU 상품을 더 많이 사줘야 한다. 우리와 FTA가 비준되지 않아 미국 상품이 얼마나 밀리는지, 우리와 FTA가 발효되어 유럽 상품 수입이 얼마나 늘어나는지 보여줘야 한다. FTA가 얼마나 일자리를 만들 수 있고, FTA의 비준이 늦어지는 게 얼마나 일자리를 잃게 하는지, ‘소비의 표’로 미국 정치인을 가르쳐야 한다. 미국이든 우리나라든, 내일의 나라 경제와 일자리보다 오늘의 표에 눈이 먼 정치인들을 가르칠 사람은 유권자뿐이다.

김정수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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