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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북 전략, 레이건에게 배울 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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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김계동
연세대 통일학협동과정 교수
국제정치학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를 칭송하는 행사가 동유럽에서 잇따라 열리고 있다. 동유럽의 민주화는 그가 없었으면 불가능했다는 점에서 이런 추모 열기는 자연스럽게 다가온다.

 1989년 12월 3일 지중해의 섬나라 몰타에서 발표된 냉전 종식 선언의 중심에는 레이건 대통령이 있었다. 81년 레이건이 대통령이 됐을 당시 세계 질서는 ‘신냉전’이 막 시작된 상황이었다. 79년 소련이 아프가니스탄을 침공함으로써 70년대 전 기간 이어져 온 동서 양 진영의 ‘데탕트(긴장완화)’가 와해되고, 세계는 다시 양분돼 대립과 경쟁을 시작한 것이다. 미국 국민은 민주당의 평화주의자 카터 대통령의 후임으로 공화당의 강력한 보수주의자 레이건을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레이건은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지칭하고 압박을 가했다. 그 압박은 군사적이었으나 군사력을 소련에 직접 투사하는 게 아니라 미국의 군사력을 급격하게 증강시키는 간접적인 방식이었다. 소련의 장거리 미사일을 대기권 밖 위성에서 요격하겠다는 전략방어구상(SDI)이 단적인 예다. 레이건이 소련에 주는 메시지는, 소련이 미국의 군사력 증강을 따르다가 경제적인 파탄을 맞이하든지 아니면 경제력이 약하기 때문에 미국만큼 군사력 증강을 하지 못해 2등 국가로 전락하든지 선택하라는 것이었다.

 소련으로서는 어느 것도 선택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더구나 소련의 내정은 82년 브레즈네프 사망 이후 안드로포프와 체르넨코가 각기 잠시 동안 지도자가 됐다가 사망하는 불안정한 상황의 연속이었다. 마침내 85년 당 서기장이 된 고르바초프는 소련이 미국과 대립하는 건 어리석은 짓이라며 미국과 화해를 모색했다. 페레스트로이카·글라스노스트 등 개방과 개혁, ‘신사고 외교’를 펼치기 시작했다. 특히 ‘방어적 충분성’ 원칙을 제시하며 공격형 군사력을 줄이고, 더 이상 핵 개발 시험을 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레이건에게 소련이 화해와 협력을 원한다는 메시지를 보내야 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고르바초프의 진정성을 받아들인 레이건은 소련과 군축협상을 시작했다. 결국 87년 중거리핵무기폐기협정(INF) 체결과 2년 뒤의 몰타선언을 통해 냉전 종식이 이뤄진 것이다. 89년 한 해에 동유럽의 모든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됐고, 90년 독일 통일이 이뤄졌으며, 91년 소련연방 자체도 해체됐다.

 레이건이 남긴 업적은 첫째 냉전 종식과 평화 회복이었고, 둘째 공산권을 붕괴시킨 것이었다. 그런데 주목해야 할 대목은 레이건의 원래 목표가 공산권 붕괴보다는 냉전 종식과 평화 회복이었다는 점이다. 만약 그가 공산권 붕괴를 목표로 했다면 소련과 INF를 체결하지 않고 계속 압박을 가했을 것이다.

 영화배우로서는 조연급이었을지 몰라도 미국과 세계 지도자로서 레이건은 주연급이었고 많은 공적을 남겼다. 레이건은 평화를 위한 협상을 시도했고, 그 수단으로 강한 국력을 활용했다. 소련에 압박을 가해 소련이 협상에 나서도록 했고, 소련과의 협상에서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공산권의 붕괴는 공산주의 체제의 모순과 서방과의 경쟁력 저하에 따른 자체적인 붕괴 성격이 짙다.

 이런 레이건의 외교정책은 북한과 대치하고 있는 우리에게 대북 접근방식의 교훈을 주고 있다. 그것은 북한에 앞서 있는 국력을 북한을 붕괴시키려는 데보다는 북한과 평화협상을 하는 데 활용해야 한다는 점이다. 외부 압박에 의해 국가가 붕괴되는 경우는 드물고 오히려 더 큰 갈등을 조장할 수 있다. 레이건이 한 것처럼 앞선 국력을 활용해 북한이 협상에 나오도록 적극적인 개입정책을 추진해야지 북에 끌려다니는 협상을 해서는 안 된다.

김계동 연세대 통일학협동과정 교수 국제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