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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은 삶을 지탱해 주는 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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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윤묘희
전 MBC ‘전원일기’ 작가

20여 년 전 방송작가 수업을 할 때 이야기다. 오십 중반에 시작한 늦깎이 공부이다 보니 막내딸 또래의 수강생들과 어울려야 했고 강사진도 거의 나보다 젊었다. 그러니 가끔 회식자리에서는 술잔에 불편함이 있었고, 수업시간에는 기억이 가물거려 젊은이들이 한 번 들어 이해할 대목도 나는 되묻고 곱씹고 하며 힘들게 공부했다.

 그때 매학기 수업의 일환으로 방송국 견학이 있었는데, 일반인은 꽤 번거로운 절차를 거쳐야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우리를 인솔한 젊은 여강사는 달랑 작가 명찰만 재킷 앞섶에 꽂고 경비원의 인사까지 받으며 당당하게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그런데 그 모습이 그렇게 멋져보일 수가 없었다. 나는 언제나 저렇게 할 수 있을까, 참 많이 부러웠다. 한편 반백의 내 모습에서 자존심도 상했다. 나는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나도 언젠가는 내 사진이 들어 있는 작가 명찰을 달고 당당히 드나들 것이다’고.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드라마를 써야겠다는 생각보다 명찰이 부러워 꼭 작가가 되어야겠다는 유치한 꿈을 키웠던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온다. 그 후 나는 자신과 약속을 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하루에 드라마 한 페이지는 꼭 쓰고 잘 것을. 사실 식솔을 챙겨야 하는 주부로서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원고지와 씨름하며 진땀만 흘리다 날밤을 새우기 일쑤였다. 너무 힘들어 편안한 일상으로 돌아가고도 싶었다. 해쓱해진 새벽별을 보며 눈물을 흘린 적도 있다. 그럴 때면 “세끼 밥 걱정 없으면 고생길 들어서지 말고 책보 싸라”며 으름장을 놓던 어느 강사의 충고가 다잡았던 마음을 여지없이 흔들곤 했다.

 그 후 나는 치열한 경쟁을 뚫고 방송국에 입성해 그 꿈(?)을 이루었다. 그렇게 갖고 싶어 했던 작가 명찰을 달고 몇 년 동안 열심히 드라마를 썼다. 내 경험을 예로 든 것은 어쭙잖은 꿈일지라도 꿈이 있었기에 많은 어려움도 이겨낼 수 있었고, 꿈은 나이에 상관없이 삶을 지탱해 주는 원동력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서다. 나이 들었다고 무위무사(無爲無事)의 삶으로 일관하다 보면 여기저기 아픈 데만 많아지고 하루하루가 살얼음판을 걷는 기분이 되기 십상이다. 작은 일이라도 자신이 이룰 수 있는 꿈을 찾아 그 일에 매진하는 생산적이고 활기찬 노년이 되도록 노력해야겠다.

윤묘희 전 MBC ‘전원일기’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