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호준의 골프 다이어리 <21> 그랜드슬램의 변종, 타이거슬램과 호건슬램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경제 22면

1년에 4개 메이저 대회에서 모두 우승하는 그랜드슬램은 골프에서 단 한 번 나왔다. 1930년 보비 존스가 했다.

아류는 두 번 나왔다. 타이거 우즈는 2000년 US오픈부터 이듬해 마스터스까지 4개 메이저대회에서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 골프계가 발칵 뒤집혔는데 2년에 걸쳐 나온 것이어서 그랜드슬램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뭔가 대우를 해줘야 했다. 그래서 만들어낸 말이 타이거 슬램이다.

벤 호건은 1953년 3개 메이저대회(마스터스, US오픈, 브리티시오픈)에서 우승했다. PGA 챔피언십은 브리티시 오픈과 날짜가 겹쳐 나갈 수 없었다. 당시 호건의 기세로 봤을 때 PGA 챔피언십에 나갔다면 거기서도 우승하고, 그랜드슬램이 가능했을 거라는 동정론이 있었다. 게다가 호건은 커다란 교통사고를 딛고 일어선 의지의 인물이었다. 이에 대한 영화(Follow the Sun)까지 나와 흥행에 성공해 여론은 매우 호의적이었다. 미국 언론은 이를 호건 슬램이라고 정리했다.

이름에 슬램이라는 별칭을 만든 두 선수는 입지전적인 인물이다. 우즈는 백인 스포츠에서 흑인이라는 핸디캡을 극복하고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나이키 등 기업들과의 관계 때문에 우즈는 민감한 얘기를 하지 않지만 어릴 적 연습장에서 쫓겨나는 등 인종차별을 당했다. 알려진 것 이외에도 수많은 고통을 겪었을 게다. 호건은 어릴 적 아버지의 권총자살(직접 목격한 것으로 알려졌다)과 왜소한 체구, 부족한 운동신경 등 불리한 조건들을 넘었다.

자신의 이름을 딴 슬램도 대단했지만 둘의 하이라이트는 US오픈이라고 기자는 본다. US오픈은 골프에서 가장 거칠고 힘든 전투라고 불린다. 이런 치열한 전투라야 진정한 영웅이 나온다. 우즈는 2008년 수술을 해야 할 무릎 부상 속에서 US오픈에 참가했다. 당시 US오픈은 골프대회 사상 가장 전장이 긴 코스에서 열렸다. 우즈는 18홀 연장에 재연장까지 91홀에 걸쳐 4만 야드를 걸어야 했다. 최후의 승자는 타이거였고 마지막에 전율이 일 정도로 뜨겁게 포효했다.

호건은 1949년 초 중앙선을 침범한 고속버스와 충돌하는 사고를 당했다. 다시 걷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판정을 받을 정도로 큰 사고였다. 그러나 그는 다리에 붕대를 감은 채 50년 6월 US오픈에 출전했다. 다리에 피가 통하지 않고 어지럼증도 심해 휘청휘청 걸으면서도 끝내 우승한 그의 모습은 골프가 만들 수 있는 최고의 묵시록이라고 당시 언론은 평했다.

두 선수는 부상병으로 참전한 전투에서 최고의 승리를 거뒀다. 그러나 이후 두 선수의 행보는 확 달라진다. 호건은 이후 메이저 5승을 더 했다. 다리의 통증은 계속됐지만 이후 호건 슬램을 이루는 등 교통사고 이전보다 뛰어난 활약을 보여줬다.

우즈는 절뚝거리며 US오픈에서 우승한 후 3년이 지나도록 메이저대회 우승을 하지 못했다. 의사의 만류를 뿌리치고 나간 US오픈 우승컵의 후유증은 매우 큰 것으로 보인다. 그는 아직도 무릎의 고통을 덜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 와중에 우즈도 자동차 사고를 겪었다. 2009년 자신의 집 앞 소화전을 들이받는 경미한 사고였으나 이후 스캔들의 판도라 상자가 열리며 고통을 받았다.

이번 US오픈에 우즈는 없다. 조직위는 세계랭킹 1, 2, 3위를 한 조에 묶어 놓는 등 흥행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최경주는 메이저 우승 없는 선수 중 최고의 조에 들었다. 그러나 10여 년 동안 US오픈을 호령하던 우즈가 없으니 포장은 거창한데 알맹이는 부실한 싸구려 선물세트처럼 느껴진다.

호건이 사고를 당한 건 37세였다. 사고 이후 최고의 전성기를 달렸다. 흥미로운 점도 있다. 교통사고 후 메이저 6승을 거둔 기간이 한국전쟁 기간과 일치한다는 점이다. 그는 50년 6월 US오픈에서 우승했고 한국전쟁 휴전협정이 체결된 53년 7월 브리티시 오픈에서 여섯 번째 우승컵을 들었다. 우연의 일치겠지만 전투처럼 치열하게 골프를 한 호건이 주는 메시지도 있는 듯하다.

우즈는 35세다. 네 차례 수술을 받은 35세의 운동선수 무릎이 괜찮을 리 없다는 것이 의사들의 의견이다.

그러나 호건을 보면 “전성기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우즈의 말도 믿을 수 있을 것 같다. 그는 아류 슬램이 아니라 진정한 그랜드슬램을 원하고 있을 것이다.

성호준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