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문창극 칼럼

'꼰대' 소리를 듣더라도 …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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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지난 몇 주 사이 우리는 아이들과 관련된 몇 가지 당혹스러운 일들을 경험했다. 학교에서 일기검사하는 것을 인권침해라 하고, 중.고생 두발 단속도 인권침해 소지가 있다고 인권위가 개입했다. 비슷한 맥락으로 고1학생들이 입시제도에 항의해 집단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과거 같으면 문제가 되지도 않을 일들이 지금은 큰 시빗거리가 됐다. 문제를 제기한 쪽이나 이를 반대하는 쪽이나 나름의 논리는 있다. 그러니 이 말을 들으면 이게, 저 말을 들으면 저게 맞는 것 같다.

그렇다. 지금 우리는 혼란의 시대에 살고 있다. 부모나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무엇이 옳다는 얘기를 해 주기 어렵다. 부모나 선생님 말씀이 하늘 같았던 시대는 사라졌다.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휴대전화.인터넷으로 정보와 지식을 나누고 감정을 공유한다. 어른들은 아이들을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는 무력감에 빠져 있다. 그들의 감성을 건드리고 그들의 입맛을 잡아내는 사람만이 대박을 터뜨린다. 정치나 장사나 똑같다.

요즘 10대는 물론이고 20~30대의 젊은 층은 신문을 읽지 않는다. 선진국의 경우 가구 구독률이 70%대를 유지하고 있는데 한국은 구독률이 점점 낮아져 40%대에 머물고 있다. 구태여 신문을 읽을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인터넷에 들어가면 모든 것을 더 많이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문 기피현상이 그러한 편리성 문제에서만 비롯된 것은 아니다. 신문 기피는 시류와 연결돼 있다. 과거에는 신문에서 무슨 말을 했느냐가 중요했다. 사설과 중요한 칼럼을 읽으며 세상사에 대한 판단을 얻었다. 그러나 요즘 세대는 신문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다. 인터넷에 떠다니는 수많은 정보 가운데 자기 입맛에 맞는 것만 찾아 읽는다. 이해하기 어렵거나 훈계조는 거들떠보지도 않는다. 느낌만 그럴듯하면 그리로 몰린다.

정보가 다양해짐으로써 과거에는 절대적인 것으로 믿었던 사안들도 부정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흰색만 있는 줄 알았는데 검은색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러나 둘 중 어느 것이 옳으냐의 문제는 알지 못하고 알려고 하지 않는다. 어떤 이는 "진리의 빛깔은 회색"이라고까지 말한다. 세상에 절대적인 것은 없고 모두 상대적이라고 말한다. 그러니 혼란스러운 것이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두발.일기 문제도 '교육'이라는 가치와 '자유'라는 가치의 혼란에서 비롯된 것이다. 과거에는 '교육'이라는 한마디로 모든 것이 허용됐지만 이제는 "내가 싫다는데 왜 강요하느냐"고 따지는 것이다. 이발기계로 아이들의 머리를 민다고 해결되지 않는다.

그렇다면 모든 것을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 둬야 하느냐다.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변하지 않는 가치들이 있다. 개인으로 보면 '정직해야 한다''부지런해야 한다''신실해야 한다'등은 세상이 아무리 변한다 해도 그 가치가 바뀌지 않는다. 사회적으로 본다면 '평등은 그럴듯해 보이지만 경쟁이 없으면 결국 전체가 퇴보한다'는 것도 불변의 화두다. 지금 아이들의 느낌에 맞지 않고, 싫어한다고 가치가 퇴색되지 않는다. 이런 것들이 수천 년의 역사를 견디며 살아남아 있는 것은 그만한 가치를 품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가 대를 이어갈 수 있는 힘은 바로 이러한 가치들이 전승되기 때문이다. 물론 공동체를 위해 타협할 수 있는 가치들도 있다. 그러나 사회의 근간이 되는 핵심적 가치는 그럴 수 없는 것이다. 흰색과 검은색의 선택이 어렵다고 회색을 권할 순 없는 것이다.

두발 문제나 일기검사 문제는 '때'를 더 고려해야 한다. 아이들의 인권과 자유를 소중히 여겨야 한다. 동시에 절제와 규율과 질서의 가치도 중요하다. 만일 성인이었다면 전자가 더 소중한 가치일 수 있다. 그러나 아이들은 배우는 '때'라는 점이 더 고려돼야 한다. 선생님들이 아이들의 사생활을 캐내려고 일기검사를 하겠는가. 교육 때문이다. 단정한 복장과 몸가짐을 가르치는 것도 교육 때문이다. 입시 문제도 마찬가지다. 좋은 대학 들어가려는 사람은 많고 뽑는 학생 수는 정해져 있으니 경쟁은 불가피한 것이다. 마치 시험 없는 세상을, 경쟁 없는 나라를 만들어줄 것처럼 말하면서 시험제도를 계속 바꾸니 아이들이 혼란스러운 것이다.

아이들이 싫어하더라도, '꼰대'소리를 듣더라도 할 말은 해야 한다. "인터넷에 서투르고, 휴대전화 문자 보내기에 더듬거려도 이 부모가 지켜온 소중한 가치만은 너희들에게 이어지게 만들고 싶다. 그래야 너희들도 사람답게 살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문창극 논설주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