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플, 휴대전화 AP 설계 인력 서둘러 뽑아…실리콘밸리선 무슨 일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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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에 있는 애플 본사 연구소 내부. 애플의 비밀주의 때문일까, 현지에서 만난 애플의 전·현직 엔지니어들은 한사코 이름 밝히기를 거부했다.


이달 8~11일 미국 캘리포니아주 실리콘밸리. 현지에서 만난 엔지니어들은 “애플이 삼성으로부터 납품받아 오던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를 다른 업체에서 공급받으려는 의도가 분명해 보인다”고 입을 모았다. AP 설계의 전 과정을 직접 해결할 수 있게 돼 더 이상 삼성의 기술력이 필요치 않게 됐다는 것이다. AP는 PC의 중앙처리장치(CPU)에 해당하는 휴대전화의 핵심 부품이다.

◆“2, 3년 전부터 전문가 대거 영입”=안 그래도 월스트리트 저널 같은 미국 언론은 최근 미국 증권사 파이퍼 제프리의 보고서를 인용해 “인텔이 애플의 AP 납품에 눈독을 들이고 있다”고 보도했다. 하지만 현지 엔지니어들은 “인텔보다 대만 TSMC로 물량이 갈 가능성이 더 크다”고 봤다. 실제로 실리콘밸리에는 TSMC가 올 4분기부터 애플 AP 물량의 일부를 맡게 됐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아이폰 생산 초기만 해도 애플은 삼성에 AP 설계의 상당 부분을 맡겼다. 애플의 내부 사정을 잘 아는 현지 엔지니어 A씨는 “그러던 것이 애플이 직접 담당하는 부분이 점점 많아져, 이제는 마무리에 해당하는 백 엔드 공정까지 직접 처리하는 데 무리가 없게 됐다”고 말했다. 실제로 아이폰4에 들어간 AP인 A4는 애플이 직접 설계한 것이다. 이는 애플이 약 2년6개월 전부터 반도체 및 AP 전문가를 대거 영입해 온 사실과 관련이 깊다. A씨는 “현재 애플은 반도체 설계 전문회사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라고 말했다.

현지의 반도체 전문업체에서 일하는 설계전문가 B씨도 “특히 지난해 수백 명의 사람을 뽑아갔다. 나도 제안을 받았고 실제 우리 회사에서 애플로 이직한 사람이 몇 명 있다”고 말했다.

 실리콘밸리에 있는 직원 100~300명 규모의 반도체 전문기업에서 설계 전문가 비중은 20% 정도다. 두세 사람만 빠져나가도 회사에 큰 타격이 온다. 이 때문에 최근 2, 3년 애플이 관련 업계로부터 원성을 많이 샀다는 후문이다. 애플은 또 구인을 시작한 때와 비슷한 시기인 2008년 4월 현지 반도체 설계 전문업체인 PA새미를 2억7800만 달러에 인수한 바 있다. 애플과 관련이 깊은 엔지니어 C씨는 “당시 창업 6년밖에 안 된 회사를 직원 1인당 무려 270만 달러에 사들여 큰 화제가 됐다”고 전했다.

애플 구인 사이트에 올라 있는 반도체 칩 설계 관련 인력 모집 공고들. 현지 엔지니어들은 “지난해엔 이보다 훨씬 많은 모집 공고가 떴었다”고 전했다.

 ◆삼성 견제냐, 역량 강화 포석이냐=삼성 현지법인 쪽으로부터도 이런저런 소문이 흘러나왔다. 한 관계자는 “메모리 반도체 주문이 줄었으며, 애플과 AP 관련 협업을 하는 팀의 일도 줄었다는 얘기가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삼성SDI가 납품하는 아이폰·아이패드용 배터리 물량은 오히려 늘었다고 한다. 이에 대해 현지 엔지니어들은 “실제 애플이 AP 생산처를 삼성이 아닌 다른 곳으로 돌린다 해도 그 외 부품 공급은 계속 받을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애플이 AP 공급처를 바꿀지 모른다는 예측의 근거로는 ‘삼성 견제론’이 가장 유력하게 제기됐다. C씨는 “삼성이 아이폰·아이패드의 AP를 제작하는 과정에서 정말 많은 걸 배웠을 거란 게 애플 내부 시각”이라고 말했다.

국내 모 정보기술(IT) 기업 현지법인의 임원 D씨는 “예를 들어 애플은 카메라를 직접 생산하지 않지만 내부엔 최고 전문가들이 포진해 있다. 이들이 협력업체에 까다로운 주문을 넣고 불만을 제기하는 과정에서 협력업체의 기술이 크게 향상되는 것은 사실”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이렇게 쌓은 기술력을 삼성이 갤럭시S, 갤럭시탭과 같은 아이폰·아이패드 경쟁 제품 제조에 적용할 수 있는 점에 애플이 큰 우려를 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애플이 원하는 수준의 AP를 보다 빨리, 저렴한 가격에 수급받기 위해서란 시각도 있다. C씨는 “그간 삼성은 AP 제작에 자사의 여러 재료들을 활용했다. 애플로선 ‘그렇게 안 하는 게 오히려 낫지 않을까’란 생각을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아울러 모바일 기기 전용 부품인 AP의 사용처가 갈수록 다양해지면서 ‘미래의 금침’이라 불릴 만큼 가치가 커지고 있는 상황도 한몫했다는 설명이다.

인텔이 아닌 TSMC를 대체 공급처로 꼽는 데 대해 B씨는 “현재 아이폰·아이패드의 AP는 영국 ARM사의 기술에 기반한 것”이라며 “이를 인텔 것으로 대체할 경우 운영체제(OS) 디자인 자체를 뿌리부터 바꿔야 한다”고 말했다.

 ◆“예상 가능 시나리오…피해 작을 것”=하지만 현지 엔지니어들은 애플이 AP공급처를 바꾼다 해도 당장 급격한 변화가 오지는 않을 것이라고 봤다. 삼성 관계자는 “특정 제품에 맞는 AP 설계는 1년6개월 이상이 걸린다”며 이같이 말했다. 설사 애플-삼성 간 AP 거래가 끊긴다 해도 삼성에는 큰 타격이 되지 않으리란 전망도 나왔다. 대신증권의 강정원 반도체 전문 애널리스트는 “AP 사용처가 많아지면서 애플의 비중이 낮아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샌프란시스코=이나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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