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216) 김일성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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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청년예술극원 시절의 진산(앞줄 오른쪽 첫째)과 쑨웨이스(앞줄 오른쪽 둘째). 저우언라이(뒷줄 왼쪽 둘째)와 덩잉추(뒷줄 왼쪽 넷째) 부부의 모습도 보인다.

1950년 10월 14일, 베이징 청년궁(靑年宮)은 온종일 결혼식 준비로 분주했다. 시간이 되자 예복을 잘 차려 입은 명배우 진산(金山·김산)과 홍색공주 쑨웨이스(孫維世·손유세)가 문 앞에서 하객들을 맞이했다. 한국전 출병 문제로 정국이 어수선할 때였지만, 각 분야의 내로라하는 사람들로 식장이 가득 찼다. 쑨웨이스에게 진산을 빼앗긴 영화배우 장루이팡(張瑞芳·장서방)은 볼일이 있다며 상하이행 첫 비행기를 탔다.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의 부인 덩잉추(鄧潁超·등영초)가 혼자 나타나자 쑨웨이스는 실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총리는 중요한 회의가 있어서 못 온다”고 해도 얼굴이 펴지지 않았다. 저우는 “중국 최고의 바람둥이에게 딸을 도둑맞았다”며 두 사람의 결혼을 탐탁해 하지 않았다. 쑨웨이스는 세상이 다 아는 저우언라이의 수양딸이었다. 모스크바에서 연극을 공부하던 시절 린뱌오(林彪·임표)의 청혼을 받았고,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과도 친했다.

두 사람의 결혼을 가장 기뻐한 사람은 마오의 부인 장칭(江靑·강청)이었다. 며칠 후면 한국전에 나갈 마오안잉과 두 딸을 데리고 직접 식장을 찾았다. 애물단지를 치우기라도 하는 듯, 속이 후련한 표정이었다.

진산은 1930대부터 중국의 연극과 영화계를 주름잡은 최고의 스타였다. 사생활도 ‘무대 황제’라는 별명에 걸맞았다. 상하이 시절, 유명작가이며 문화 수준이 가장 높았던 여배우 왕잉(王瑩·왕형)과 결혼했지만 왕잉은 “이 사람과는 도저히 못살겠다. 한 달에 얼굴 한 번 보기가 힘들다”며 친구 펄벅이 있는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1932년 공산당에 입당한 진산은 항일전쟁이 발발하자 저우언라이를 찾아가 옌안(延安)에 가겠다고 졸라댔다. 당시 옌안에는 도시에서 몰려온 여학생들이 많았다. 저우는 더 중요한 일을 해야 한다며 상하이에 남아 있기를 권했다. 진산은 국민당 고위 관료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국민당 핵심부에 잠복시킬 지하당원으로 안성맞춤이었다.

신중국 선포 후 중국청년예술극원(藝術劇院)이 문을 여는 날, 원장 랴오청즈(廖承志·요승지)가 참석자들에게 부원장이라며 진산을 소개했다. 총감독 쑨웨이스도 그 자리에 있었다. 명배우 진산이 17년간 국민당에 잠복해 있던 공산당원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진산이야말로 진짜 연기자”라며 예술계 전체가 경악했다.

결혼 3개월 후, 진산은 중국문화예술위문단과 함께 한국땅을 밟았다. 중공군이 서울을 점령한 직후였다. 김일성은 중국에서 종씨가 왔다며 반가워했다. 진산이 “귀국하면 중·조연합군이 미군과 싸운 이야기를 영화로 만들겠다. 김일성 장군 역을 내가 맡겠다”고 하자 김일성은 안내 겸 통역으로 미모의 여비서를 붙여 줬다.

며칠 후 김일성은 진산과 여비서 사이에 얄궂은 일이 발생했다는 보고를 받았다. 여비서를 총살하고 펑더화이에게 달려갔다. “진산이 우리의 신성한 주권을 침해했다”며 처형을 요구했다. 김일성과 충돌이 잦던 펑더화이도 이 일만은 김일성 편을 들었다. 저우언라이에게 “진산의 목을 줘버리자”는 전문을 보냈다. 화들짝 놀란 저우는 본국으로 압송하라는 답전을 보냈다. 김일성은 모른 체했다.

문혁 시절, 쑨웨이스는 장칭과 린뱌오의 부인 예췬(葉群·엽군)에게 호된 보복을 당했다. 저우언라이의 손이 미치지 않는 공군감옥에서 숨을 거뒀다. 진산도 홍위병에게 끌려갔다. 쑨웨이스에게 동생이 한 명 있었다. 이름이 신스(新世·신세)였다. 문혁이 끝나고 출옥한 진산은 인생에 마지막 솜씨를 과시했다. 신스와 살림을 차렸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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