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냉키 100년 만의 소통 … 월가 평점‘A-’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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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수님’ 같은 첫 회견 벤 버냉키 미국 연방준비제도이사회(FRB) 의장은 27일 FRB 사상 처음으로 기자회견을 열고 양적 완화·출구전략을 설명했다. 그러나 그는 전임자 앨런 그린스펀처럼 카리스마적이지 못했다. 재기 넘치는 말솜씨를 뽐내지도 못했다. 꼼꼼하게 강의를 준비한 백면서생의 모습이었다. [블룸버그]


국제금융시장이 깜짝 놀랄 ‘뉴스’는 없었다. 대신 ‘비밀의 사원’으로 불린 연방준비제도(FRB)의 ‘역사’는 새로 썼다. 벤 버냉키(Ben Bernanke) FRB 의장은 27일(현지시간) 미국 워싱턴의 FRB 본부에서 ‘97년 만의 기자회견’을 열었다. FRB 의장이 통화정책 방향에 대해 기자의 질문을 받은 건 1914년 창립 이후 처음이다.

 안팎의 기대와 우려를 의식한 듯 버냉키는 긴장한 빛이 역력했다. 2시15분부터 15분간 모두발언에 나선 그의 목소리는 가볍게 떨렸다. 한 시간여에 걸쳐 19명의 기자가 질문하는 동안에도 그는 의자에 몸을 기대지 않고 시종 꼿꼿하게 앉아 답변했다. 그가 벤치마킹 대상으로 삼은 장클로드 트리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와는 사뭇 다른 태도였다. 트리셰는 편한 자세로 앉아 시원찮은 질문을 하는 기자는 조롱하기도 하는 여유를 보인 바 있다. 첫 기자회견이었기 때문인지 애초 예상과 달리 기자들의 질문에도 날이 바짝 서있진 않았다. 버냉키 답변의 말꼬리를 잡아 후속 질문을 던진 기자도 두 명뿐이었다. 대부분 질문이 예상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은 듯 버냉키는 질문이 끝나자마자 술술 답변을 이어갔다. 대학 동창 기자가 던진 마지막 질문 때는 농담을 섞을 만큼 여유가 있었다. 그렇지만 끝까지 시장을 흔들 만한 돌발 발언이나 말실수는 없었다.

 출구전략을 암시하는 언급이 나올까 촉각을 곤두세운 시장은 안도했다. 26개월째 유지된 ‘상당기간 초저금리를 유지한다’는 문구를 버냉키가 당분간 빼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상당기간’이란 문구의 뜻도 부연설명했다. 출구전략에 나서는 ‘행동’을 취하기 전에 FRB의 통화정책 결정기구인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를 최소한 ‘두어 차례(a couple of)’ 더 열 것이란 얘기다. FOMC는 6주마다 열린다. 따라서 ‘상당기간’이란 문구가 FOMC 성명에서 빠지더라도 6~12주 정도는 시장이 출구전략에 대비할 시간여유를 주겠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더욱이 6월 2차 양적완화 정책 종료 이후에도 그는 FRB의 금융완화 정책이 바뀌지 않을 것이라고 확인했다. FRB가 보유한 채권의 만기가 돌아와도 이를 상환받는 즉시 재투자하겠다는 것이다. 그는 물가에 대해서도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고유가로 실제 물가가 오르긴 했으나 중장기 인플레이션 기대심리는 안정적이라고 거듭 강조했다. 인플레이션 억제를 위해 출구전략에 착수해야 할 절박성이 크지 않다는 얘기다.

 시장의 반응은 예상을 크게 빗나가지 않았다. 긴축에 대한 우려를 털어낸 뉴욕 증시는 큰 폭으로 올랐다. 달러 가치는 하락세를 이어갔다. 미 국채 가격도 2차 양적완화 정책 종료에 대한 우려로 약세를 면치 못했다. 금값은 사상 최고치를 다시 갈아치웠다.

이날 버냉키의 첫 기자회견에 대한 월가의 평가는 엇갈렸다. 비록 딱 부러지는 새로운 뉴스는 없었으나 비교적 쉽고 분명하게 FRB 정책의 내용과 한계를 국민에게 잘 설명했다는 평가가 다수다. 일각에선 버냉키가 인플레이션에 대해 안이한 태도를 보였다는 비판도 나온다. 그럼에도 전체적으로 그의 기자회견에 대해 월가는 ‘A-’ 평점을 줬다고 로이터통신이 전했다.

뉴욕=정경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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