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군 대포 이름 딴 드라이버 … 치기 쉽게 헤드 점점 키워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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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5호 20면

냉전 시대 미국과 소련처럼 골프업계에도 군비 경쟁이 있었다. 캘러웨이가 1991년 그 전쟁을 일으켰다. 창업자인 일리 캘러웨이(1919~2001)는 골프의 성인으로 불리는 보비 존스의 먼 친척으로 세계 최대 섬유회사의 사장을 역임한 수완 좋은 사업가였다. 그는 63세이던 82년 캘리포니아 불모지에 개간한 와이너리를 1400만 달러에 팔아치운 후 히코리 스틱이라는 영세 골프회사를 사서 소일거리 삼아 운영했다.

성호준의 골프 진품명품 <9> ‘군비경쟁’ 일으킨 캘러웨이 빅 버사(big bertha)

당시 용품업계는 임원들끼리 친선 골프 대회를 할 정도로 경쟁이 느슨했다. 또 프로를 위한 클럽을 만들면 아마추어 골퍼는 따라 쓸 거라는 생각이 팽배했다. 캘러웨이는 이러한 나태함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평범한 골퍼를 위한 클럽에 전력투구했다. 당시 무기를 클럽의 이름으로 쓰는 것이 유행이었다. 캘러웨이는 제2차 세계대전 중 군에서 복무해 무기에 대한 지식이 많았다.

그는 “클럽 이름을 그냥 대포(canon)로 부르기보다는 무시무시한 화력을 가진 빅 버사(big bertha·사진)로 부르자”고 했다. 빅 버사는 독일군의 수퍼 헤비급 곡사포다. 정확히 말하면 1차대전 말 나온 구경 42㎝(16.5인치)의 대포지만 이후 나온 독일의 대형 포들도 빅 버사라고 통칭한다.

많은 사람이 왜 하필 독일군 무기냐며 빅 버사라는 이름에 반대했다. 그러나 캘러웨이는 밀어붙였다. 빅 버사의 위력은 엄청났다.

이전까지 일반적인 드라이버(1번 우드)의 헤드 크기는 130cc 정도였다. 다른 우드와 별 차이가 없었다. 페이스 크기는 요즘 아이언의 사이즈보다 작았다. 헤드가 작아 아마추어가 드라이버로 공을 맞추기가 간단치 않았다. 빅 헤드 드라이버의 시대를 연 빅 버사는 190cc였다. 91년 5500만 달러어치를 팔았다.

캘러웨이의 군비 증강은 끝이 없었다. 94년 195cc짜리 빅 버사 워 버드(war bird)를 만들더니 95년 250cc로 커진 그레이트 빅 버사(GBB)를 냈다. 이후에도 진군은 계속됐다. 97년엔 290cc의 BBB를 출시했다. Biggest Big Bertha의 약자다. 경쟁업체들은 최상급으로 표현된 BBB가 군비경쟁의 끝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여제’ 안니카 소렌스탐이 캘러웨이의 선봉장으로 나섰다. 라이벌인 테일러메이드는 캘러웨이와 치열하게 경쟁했다. 2002년 캘러웨이는 380cc짜리 GBB II를 개발했다. 군비 경쟁은 용품 규제에 대한 권한을 가진 영국왕실골프클럽(R&A)이 460cc로 헤드 크기를 제한하면서 2007년 BB460으로 끝났다. 남성 골퍼들은 가장 긴 클럽인 드라이버를 성기로 연상해 헤드 크기가 커질 때마다 드라이버를 새로 산다는 해석도 나왔다.

헤드 크기를 키우는 과정에서 많은 혁신이 생겼다. 캘러웨이는 헤드 무게를 줄이려 가볍고 강한 티타늄을 쓰는 소재혁명을 일으켰다. 티타늄은 냉전 당시 미사일 껍데기로 쓰인 신소재였다. 냉전이 끝나면서 티타늄의 쓸모가 줄었는데 골프 용품업체에서 이를 흡수했다.

드라이버는 캐디백에서 가장 무서운 클럽이었지만 캘러웨이가 주도한 혁신 이후 가장 친근한 클럽이 됐다. 빅 버사가 골프에 미친 영향은 사이즈가 커진 라켓이 테니스에 미친 영향과 비슷했다.

국내에서는 장식이 들어간 캘러웨이(Callaway) 로고의 C를 G로 생각해 갤러웨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많다. 캘러웨이의 할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으로 세상을 떴다. 그래서 캘러웨이는 술 때문에 재능을 썩히는 존 댈리를 갱생시키기 위해 매우 노력했다. 그러나 실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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