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바마, 국익 위해 자존심 버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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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국가부채 한도를 늘려달라는 건 대통령 리더십의 실패를 자인하는 것이다.”

 2006년 버락 오바마(Barack Obama·사진) 일리노이주 연방 상원의원은 조지 W 부시(George W. Bush) 대통령을 향해 날을 세웠다. 당시 초선이었던 오바마는 “정부의 방만한 씀씀이 때문에 우리가 외국 정부에 손을 벌려야 하는 입장에 처했다”며 부시를 몰아붙였다. 2005년 두 번째 임기를 시작한 부시는 1년 만에 국가부채 한도를 8조9600억 달러로 증액시켜 달라는 안건을 의회에 제출한 터였다. 2005년 7조6000억 달러였던 미국의 국가부채는 잇따른 이라크·아프가니스탄 전쟁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나 법으로 정한 한도를 초과하기 직전이었다.

 국가부채 한도를 증액해 주지 않으면 미국 정부가 법적으로 부도를 낼 수 있다는 부시의 호소에도 민주당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바마를 비롯한 민주당 상원의원 전원이 반대표를 던지는 바람에 당시 국가부채 한도 증액 안건은 상원에서 찬성 52대 반대 48표로 아슬아슬하게 통과됐다. 그런데 5년이 흐른 올해 오바마는 정반대 입장에 섰다. 7일 현재 미국 국가부채는 14조2120억 달러로 법적 한도인 14조2940억 달러의 턱밑까지 찼다. 다음 달 16일까지 의회가 국가부채 한도를 증액해 주지 않으면 한도가 다 찰 전망이다. 이렇게 되면 미국 정부는 더 이상 자금을 조달할 수 없게 된다. 이는 다시 미국 국채 부도로 이어져 미국은 물론 세계 금융시장을 대혼란에 빠뜨릴 수 있다.

 현재 미국 상원은 민주당이 다수지만 하원은 공화당이 장악하고 있다. 공화당이 국가부채 한도 증액에 반대하는 한 이 안건을 의회에서 통과시키는 건 불가능하다. 진퇴양난에 빠지자 오바마는 11일(현지시간) 자존심을 접었다. 그는 제이 카니 백악관 대변인을 통해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반대표를 던진 게 후회스럽다”고 반성했다. 카니 대변인은 “오바마 대통령은 국가부채 한도를 늘리는 것이 미국은 물론 세계 경제에 지극히 중요하기 때문에 정부 정책에 반대하더라도 이 문제를 가지고 장난을 쳐서는 안 된다는 점을 깨달았다”고 전했다. 5년 전 상원에서 그가 부시의 국가부채 한도 증액에 반대표를 던진 데 대해 공화당에 공식 사과한 것이다.

 그러나 공화당이 오바마의 사과를 받아들일지는 미지수다. 공화당은 궁지에 몰린 오바마를 몰아붙여 정부 지출을 대폭 깎겠다는 입장이다. 이를 통해 오바마의 최대 치적으로 꼽히는 건강보험개혁과 재계가 반대하는 온실가스 감축계획을 무력화하겠다는 심산이다. 내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오바마로선 받아들이기 어려운 카드여서 협상은 난항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뉴욕=정경민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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