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민주화 세력, 잘난 척하면 안 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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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민주화 운동으로 평생을 보낸 정성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이 운동권 동료·후배들을 향해 쓴소리를 던졌다. “민주화 운동 세력은 과거의 경력을 훈장처럼 달고 다니지 말고 민주화 성과를 국민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것이다. “생명이라는 절대 가치를 운동이라는 이름으로 수단화하지 말라”고 했고, 북한에 대해서는 “인민을 굶기니 정당성이 없다”고 따끔하게 지적했다.

 사회가 좌·우, 진보·보수로 갈라져 서로 네 탓을 일삼는 상황이라 정 이사장의 쓴소리가 더욱 돋보인다. 그의 일갈이 진보 집단에만 해당한다고 보아선 안 된다. 보수 원로 중에는 동료·후배들의 비난·반발 가능성을 무릅쓰고 용기 있게 보수의 문제점을 지적할 만한 인사가 과연 몇 명이나 되는지 이번 기회에 깊이 자성해야 옳다.

 우리는 특히 정 이사장이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의 ‘화해’를 강조한 데 주목한다. “민주주의라는 소중한 가치는 특정 집단이 독점할 수 없는 것”이라는 인식 하에 올해 6·10 민주항쟁 기념행사를 민주당·운동권·한나라당·뉴라이트 인사들이 함께 참여하는 행사로 만들겠다는 취지에 십분 공감한다. 민주화 세력이 이념이나 정당·정파에 따라 갈라져 기념행사조차 한자리에서 치르지 못하는 분열상을 지양하겠다는 것이고, 나아가 민주화·산업화 세력이 손잡고 나라의 미래에 이바지할 길을 함께 찾아보자는 뜻 아니겠는가.

 정 이사장은 1964년 한·일협상 반대시위로 빚어진 6·3사태 때 처음 구속된 이래 긴급조치·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모두 네 차례나 구속돼 옥고를 치렀다. 줄곧 재야단체에서 활동하다 60대 후반 난생처음 맡은 공직이 지금 자리인 만큼 발언의 무게가 남다를 수밖에 없다. “국민은 민주화 세력에 대통령·장관·국회의원 등 보상할 만큼 해줬다고 생각한다. 잘난 척하면 안 된다”고 일갈할 자격이 있는 것이다. 솔잎혹파리병 방제, 연어부화장 지원 등 북한 돕기에도 앞장서왔기에 북한에 대한 쓴소리가 허투루 들리지 않는 것이다. 그의 발언은 철 지난 이념과 정파적 이해에 발목 잡힌 진보와 자기 개혁에 게으른 보수 모두에 경종(警鐘)을 울린 것으로 보아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