칸트 아저씨의 배신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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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2호 10면

당신도 칸트 아저씨를 알 것이다. 만일 집이 분당 서현동에 있고 직장은 강남에 있는데 오전 7시30분쯤 효자촌 우성프라자 정류소에서 8131번 버스를 타고 출근한다면 말이다. 칸트 아저씨는 매일 아침 당신이 타는 8131번 버스의 하차문 바로 앞자리에 늘 그렇게 같은 모습으로 앉아 있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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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비슷한 출근시간대에 같은 버스를 이용하는 승객이라면 기억에 남는 사람이 생길 수 있다. 그러나 가능성과 실제는 다르다. 잠시 눈을 감고 아침 출근길 버스에서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을 생각해 보라. 아무리 애를 써도 떠오르는 얼굴이 없을 것이다. 칸트 아저씨 말고는.

우리가 그를 기억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그가 칸트 아저씨이기 때문이다. 이마누엘 칸트는 딱 한 번 루소의 『에밀』을 읽느라 열흘인가 빠진 것을 빼면 단 하루도 빠짐없이 일정한 시각에 산책을 해서 쾨니히스베르크 사람들은 산책하는 그를 보고 시계를 맞출 정도였다고 한다. 우리의 칸트 아저씨 역시 하루도 어김없이 같은 시각, 같은 버스, 같은 자리에 앉았다가 효자촌 우성프라자 다음 정류소인 서현역에서 내린다. 그는 자신의 자리를 내어 주는 사람이다. 그것도 선호도가 가장 높은 하차문 바로 앞자리를.

버스 출입구가 있는 쪽은 늘 붐빈다. 거기는 마치 수도권의 도심 같다. 불편하게 꽉 끼어 가야 하는데도 사람들은 그곳에 몰려 있다. 반면 인구밀도가 낮은 뒷자리는 한적한 시골 같은데 거기로는 사람들이 잘 안 간다. 총길이 10m가 조금 넘을까 말까 한 버스 안에서도 이처럼 지역 불균형이 심하다.

버스를 탔는데 뒤쪽에, 그러니까 전원 지역에 빈자리가 남았다. 나는 그쪽으로 가지 않는다. 나는 도시 사람이고 내게는 칸트 아저씨가 있으니까. 아저씨 자리는 목 좋은 요지, 투자가치 높은 부동산이니까. 나는 양팔을 벌려 아저씨 자리와 그 앞자리 좌석의 지지대를 잡는다. 그 자리에 대한 연고권을 주장하는 일종의 영역 표시인 셈이다.

나는 흐뭇한 심정으로 칸트 아저씨를 내려다본다. 목적이 아니라 수단으로. 아저씨는 내 뜨거운 눈길이 부끄러운지 잠자코 눈을 깔고 있다. 아저씨 속눈썹은 남자치고 길고 숱도 많다. 그는 체크무늬를 좋아하나 보다. 회색 재킷도 진초록 베스트도 남색 바지도 체크무늬다. 칸트 아저씨답게 헤어스타일 역시 변함없다. 그것은 더 이상 자라지도 빠지지도 않는 가발 같은, 그러나 자연 머리다. 아저씨는 날마다 손질을 하는지 손톱도 깔끔하다.

칸트 아저씨는 그렇게 그 자리에 앉아 있다. 그러나 나는 안다. 아저씨는 다음 정류소에서 내릴 것이다. 정류소 간 거리가 다소 길게 느껴진다. 다음 정류소에 대한 안내방송이 나온다. 아직 아저씨는 일어서지 않는다. 하차문 바로 앞자리에 앉은 아저씨는 전혀 서두를 필요가 없다. 아저씨는 버스가 완전히 정차한 다음 차분히 그리고 정확하게 일어설 것이다. 그는 칸트 아저씨니까.
드디어 버스가 정차한다. 아저씨는 계속 앉아 있다. 혹시 잠든 것일까. 나는 도시 사람이라 늘 마음이 분주하고 조급하다. 나는 아저씨 어깨를 흔들며 말한다.

“저, 아저씨 서현역인데요.”
칸트 아저씨는 나를 올려다보며 말한다.
“그런데 왜요?”


김상득씨는 부부의 일상을 소재로 『아내를 탐하다』를 썼다. 웃음과 눈물이 꼬물꼬물 묻어 있는 글을 쓰고 싶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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