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일기] 살생부 내밀고 없던 일로?

중앙일보

입력

20일 코스닥시장은 금융당국의 미숙한 행정처리로 인해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재정경제부와 금융감독위원회가 이날 오전 '코스닥시장 건전화방안' 을 공동발표하면서 미리 배포했던 보도자료 내용에 '등록취소 대상기업 58개' 부분을 삭제해 버렸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급속히 증시로 퍼져 나갔고, 투자자들과 증권사들은 취소대상 기업을 탐문하느라 하루종일 법석을 떨었다.일부 투자유의종목에서는 투매가 일어나기도 했다.

주식시장에서 등록취소는 시장퇴출을 뜻한다.사람으로 말하자면 사망선고나 마찬가지다.그래서 언론기관들은 가령 어느 기업이 1차부도를 냈더라도 기사화하지 않는 관행을 지킨다.회생가능성이 있는 기업이 1차부도 기사로 아예 최종부도가 나는 일을 막기위한 것이다.

이같은 전후관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금융당국이 숫자까지 명시해서 보도자료를 돌린후 뒤늦게 삭제요청을 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더구나 이날 발표된 건전화방안은 투자자들이 오랜전부터 예의주시해온 민감하기 짝이 없는 사안이었다.

금감위의 한 국장은 "자료상의 등록취소 대상기업 수는 현행 법규상 취소여건이 적용되는 기업일뿐 아직 취소가 확정된 것이 아니며, 만일 보도되면 시장을 혼란에 빠뜨릴 소지가 있기 때문에 삭제를 요청했다" 고 해명했다.

그는 이번 발표가 시장발전을 위한 대승적인 내용인 만큼 다소간의 실수는 용인해달라고 덧붙였다.

사실 이번 발표내용 중엔 그동안 세간에 알려졌던 '코스닥시장 죽이기' 차원이 아닌 투자심리를 고무하는 발전적 방안이 많이 담겨있다.전주말 사상 최악의 폭락을 기록한 코스닥지수가 이날 강한 반등세로 돌아선 것도 그 때문이다.

하지만 이유야 어찌됐건 기업의 생사가 달린 중대한 사안을 다루면서 시장감독을담당하는 부처들의 준비와 성의가 부족했다는 지적은 면할 수 없다.

투자자 韓모씨(35)는 "정부의 이번 처사는 마치 '살생부' 를 공개하려다 거둬들인 것이나 다름없다" 며 "이에 따른 피해는 정부가 책임질 것이냐" 고 분개했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