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 레슬링 스타, 청원경찰로 한해 넘겨

중앙일보

입력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을 두 개씩이나 따낸 레슬러들이 `매트복귀'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청원경찰로 또 한 해를 넘기고 있다.

86년 서울과 90년 북경아시안게임에서 잇따라 금메달을 땄던 오효철(36)씨와 90년, 94년 아시안게임 2연패 주인공 엄진한(35)씨는 오늘도 조폐공사(경기도 성남시분당구) 현관을 지키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다.

회사 간부들에게 인사하랴, 방문객들을 안내하랴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고 나면 다음날은 텅빈 건물을 지키는 야간 보초다.

운동복이 아닌 정복을 입고, 체육관이 아닌 건물 현관에서 보낸 지 1년 10개월.

이제나 저제나 하면서 후배들을 가르칠 기회를 기다렸지만 아직까지 이렇다할 희망도 없이 새 천년이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다.

대한레슬링협회가 조금만 노력하면 매트에 돌아 갈 길이 열릴 듯 하지만 심한 내분을 겪고 있는 협회는 옛 스타들에게 눈길을 돌릴 수 있는 여유조차 없다.

그래서 레슬링만을 생각하며 살아 온 30여년이 후회스럽기까지 하다.

조폐공사 레슬링팀 소속이었던 엄진한씨와 오효철씨는 선수시절 한국 레슬링 중량급을 대표하는 간판스타였다.

엄씨는 그레코로만형 90㎏급에서 줄곧 태극마크를 달았고 오씨는 자유형 82㎏급으로 시작한 뒤 나중에는 90㎏급으로 체급을 올렸다.

자질구레한 국제대회는 제쳐두더라도 아시안게임에서 금메달 두 개씩을 땄을 정도로 성적도 좋아 다른 선수들이 부러워 할 정도로 `성공한' 인생이었다.

그러나 선수생활을 정리하고 지도자 길을 준비할 무렵 변고가 생겼다.

팀내 감독-코치간 갈등이 생겼고 이것이 표면화되자 마침 국제통화기금(IMF)한파에 시달리던 회사는 레슬링팀 해체 결정을 내렸다.

트레이너로 내정돼 후배 양성의 기대에 부풀어 있던 이들에게 시련이 시작됐다.

98년 2월 팀은 해체됐고 이들은 `문지기'생활에 접어들었다.

이때만 해도 이들은 1년 10개월동안 현관을 지킬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조만간 팀이 다시 창단될 것으로 믿었지만 그 믿음은 시간이 갈수록 약해져만 갔다.

번갈아 근무를 하느라 함께 소주잔을 기울일 틈도 없었던 엄씨와 오씨는 지난 14일 밤 오랜만에 레슬링으로 이야기 꽃을 피웠지만 레슬링 복귀의 길은 여전히 보이지 않았다.[서울=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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