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가 압박에 정부 돈 풀기도 ‘숨고르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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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4면

정부의 정책 우선순위가 성장에서 물가로 선회하면서 재정 집행의 속도도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정부는 올 예산·기금·공공기관 주요사업비의 57%를 상반기에 집행하겠다는 목표를 정하고, 각 부처에 조기 집행을 독려해 왔다. 하지만 최근 물가 급등에 한 발짝 물러서고 있다. 기획재정부 관계자는 “과도한 집행은 자제하고, 물가와 경기 상황을 봐가면서 신축적으로 대응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조기 집행을 독려하는 강도도 조정하고 있다. ‘예산집행 특별점검단 회의’도 상황에 따라 탄력적으로 횟수를 조정하겠다는 게 정부의 입장이다.

 재정 조기 집행은 금융위기 이후 경기 활성화를 위해 정부가 써 온 주요 정책수단 중 하나다. 2008년 49.6%였던 상반기 재정 집행률은 2009년 64.8%, 2010년 61%로 급증했다. 금융위기 발발로 경기가 급속히 냉각되는 상황에서 재정 투입의 규모뿐 아니라 투입 속도도 끌어 올려 대응한 것이다. 상대적으로 경기가 빠르게 살아나고, 이후 회복세를 이어가는 데 상당한 효과를 봤다는 평가다. 지난해의 경우 재정 조기 투입으로 상반기 성장률을 0.87%포인트 끌어올리는 효과가 있었다는 게 조세연구원의 분석이다.

 문제는 그로 인한 비용도 만만치 않다는 점이다. 세금이 걷히는 속도보다 재정이 빠져나가는 속도가 빠르니 일시적으로 돈이 모자라게 되고, 이를 빌려 쓰면 금융비용을 치러야 한다. 2009~2010년 정부는 한국은행에서 대출받아 이를 메웠다. 정부에 돈을 빌려준 만큼 한은이 통화안정증권을 발행하다 보니 통화정책의 효율성을 해친다는 비판도 나왔다. 정부가 올해 5년 만에 재정증권을 발행해 자금조달에 나서기로 한 것도 이를 의식한 것이다.

 또 일단 한번 쓰면 되돌리기 쉽지 않은 문제도 있다. 재정 조기 투입 등의 영향으로 지난해 성장률은 ‘상고하저’의 흐름을 보였다. 그대로 두면 이른바 ‘기저효과’로 올해는 거꾸로 ‘상저하고’가 될 가능성이 크다. 정부가 재정 조기 집행에서 쉽게 발을 빼지 못하는 이유다. 재정부 관계자는 “최근 일본 지진 변수까지 가세해 불확실성이 더욱 높아지고 있는 만큼 57%의 조기 집행률 목표는 유지한 채 추이를 지켜보자는 입장”이라고 말했다.

 조세연구원 박형수 재정분석센터장은 “경기가 어느 정도 회복되면 기준금리와 마찬가지로 재정 집행 속도도 정상 상태로 돌려놓는 ‘출구전략’이 필요하다”면서 “재정은 당겨 썼는데 하반기에 예상만큼 경기가 좋지 않을 경우 추경예산을 편성하는 빌미가 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조민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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