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67)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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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가족회의, 본능적으로 12

그러고 보면 서랍장 안에 넣어두었던 장문도 나의 습관과 달리 삐뚜름히 놓여 있었던 것 같았다. 방으로 돌아올 때 문은 분명히 잠겨 있었다. 그렇다면 누가 문을 열고 들어와 뒤져본 후 다시 방문을 잠그고 나간 셈이었다. 열쇠쯤 아무렇지 않게 조종할 수 있는 사람이거나 열쇠를 갖고 있는 사람이라 할 수 있었다. 이사장의 방에 올라가 있던 세 시간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는 눈을 부릅뜨고 건물 위쪽을 뚫어져라 보았다.
혐의자는 김실장 한 사람뿐이었다. 세족식이 끝날 무렵 방을 나갔던 김실장이 다시 돌아온 것은 애기보살이 막 노래를 하려고 준비할 때였다. 적어도 이십여 분 이상 방을 비웠던 유일한 사람이 김실장이었다. 게다가 김실장은 마스터키에 접근할 수 있는 소수의 사람 중 하나였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김실장이 왜, 무엇을 찾으려고 내 방을 뒤진단 말인가. 혐의는 자연히 김실장에게서 백주사에게로 전이되었다. 김실장이 뒤졌다면 백주사의 명령을 받았을 가능성이 많았다. 백주사는 어쨌든 나에 대한 의심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는 눈치였으니까.

나는 다시 벌러덩 사지를 펴고 누웠다.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들이 틈입자의 주범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의 의문을 채워줄 단서가 될 만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내 방에 있는 것은 모두 샹그리라에 들어와 장만한 것이었다. 헤드랜턴이나 자일이나 몇몇 간소한 등산장비를 보았을 테지만 명안진사 출퇴근을 걸어서 할 만큼 내가 산타기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그들도 이미 알고 있었다. 당분간 샹그리라 남쪽을 싸고 있는 암벽에 오르거나 하는 일만 삼가면 될 일이었다. 그렇지만, 삼가야 한다고 생각하자마자 산으로 가고 싶은 충동이 갑자기 일었다. 강렬한 충동이었다. 그때 주차장으로 차 한 대가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차 소리만으로 나는 지금 돌아오고 있는 사람이 305호실 장어집 남자라는 걸 금방 알아차렸다. 장어집 남자는 성미가 급해 주차시킬 때에도 늘 삐익 하는 부레이크 금속성을 내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장어집 남자가 층계를 올라가고 나자 다시 적막이 왔다.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하늘은 캄캄했다. 어둠이 응집된 단단한 적막이 산을 둘러치고 있을 터였다. 겨울 숲은 이런 적막을 거느리고 있을 때가 제일 근사했다. 그곳엔 어떤 온정도 깃들 수 없으며 어떤 가름도 없었다. 오직 헤드랜턴만이 세계를 드러내고 세계를 갈랐다. 헤드랜턴에 드러나는 곳의 나무들은 햇빛 아래에서보다 훨씬 더 고혹적이었다. 그것들은 도열한 나의 뼈이자 뼈의 시종들이었다. 그리고 드러나지 않는 어둠 속의 숲은 하나의 제국이라 할 만했다. 살아 있는, 어둠의 거대한 고형(固形)이었다. 어둠의 거대한 고형은 악마적인 느낌을 동반했다. 나는 어둠보다 빛이 차라리 고통스럽다고 여긴 적이 많았다. 애당초 내가 어둠의 덩어리로부터 파생돼 나왔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안온해졌다.

시계가 곧 자정을 넘어갔다.
창밖엔 다시 히끗히끗 설편이 날리고 있었다.
나는 어두운 숲의 고혹을 이겨내지 못하고 일어나 결국은 검은 우모복을 차려 입었다. 어둠의 갈기들을 젖히면서 관음봉 정상에 올라가 눈발 속에 쓰러져 눕는 도시의 적멸을 보고 싶었다. 과음한 이사장과 백주사는 깊이 잠들어 있을 게 틀림없었다. 만약 그들이 깨어 있더라도, 어둠의 거대한 덩어리로 빨려 들어가고 난 나를 어쩌겠는가.

나는 방을 나와 주차장을 통해 뒤뜰로 나갔다.
발소리는 거의 나지 않았다. 뒤뜰에서 올려다보니 불이 켜진 방은 두 개밖에 없었다. 하나는 한 시간 전쯤 들어간 장어집 남자의 방이었고 또 하나는 206호실 노랑머리 여자의 방이었다. 장어집 남자의 방에서 흘러나온 불빛이 산으로 나가는 쪽문을 어스레하게 비추고 있었다. 나는 쪽문을 소리 나지 않게 열었다. 숲의 하단으로 흘러 내려와 단단히 응집된 어둠이 기분 좋게 종아리를 휘감고 들어왔다. 헤드랜턴을 켜지 않고도 걸어갈 수 있는 길이었다. 나는 가볍게 걸었다. 어둠이 질척이는 대신 발에 밟히는 마른 풀들의 기척은 활달했다. 그러나, 암벽을 돌아 관음봉으로 올라가는 구빗길 초입에 와서 나는 곧 걸음을 멈췄다. 뒤에서 무엇인가, 나를 따라오는 듯한 소리가 들려왔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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