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루한 일상에 대한 일격 … 정영문의 '하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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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정신 소설향의 11번째 작품인 정영문의 하품 (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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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영문은 소설집 '검은 이야기 사슬', '겨우 존재하는 인간' 등에서 인상적인 환상과 관념의 세계를 보여줘 주목받은 90년대말의 신인작가이다.

99년 동서문학상을 수상하기도 했던 정영문은 45편의 짧은 콩트를 모은 '검은 이야기 사슬'에서 악몽과 현실이 구분되지 않는 죽음과 상실의 체험이 교차되는 검고 어두운 얘기를 선보인바 있다.

'하품'은 권태에 찌든 사내의 일상을 끈질기게 묘사했던 전작 '겨우 존재하는 인간'를 모태로 한 작품. 어둡고 섬뜩한 방식이 아닌 농담을 하듯 유희적인 대화를 통해 일상의 무의미함을 꼬집는다.

"아침부터 기분이 이유 없이 별로였던 그 날 오후", 한때 알고 지내던 두 남자 '나'와 '그'는 동물원에서 우연히 만나 나누는 대화를 나눈다. 이들은 타인뿐 아니라 자신의 삶에도 관심이 없는 인물들. 이들에게 삶은 쳇바퀴 돌 듯 되풀이되는 따분한 일상이고, 모든 것은 무의미할 뿐이다.

"그는 하품을 늘어지게 했다. 그의 하품은 그가, 또는 내가 이 세계 속에 처한 상태를 집약하고 완성하는 것처럼 여겨졌다."

하품처럼 따분하고 무의미한 삶을 통해 작가는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평론가 손정수씨는 "'하품'에 등장하는 이들 '비루한 인간들'은 우리 아닌 다른 어떤 존재가 아니라 우리 속에 내재된 인간적 숙명의 다른 이름일 것"이라 말한다. 때문에 이들이 행하는 의미 없는 대화는 우리 앞에 놓여 있는 예정된 종말을 유예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래서 소설속의 '그'는 이렇게 말함으로 얘기를 끝맺는다.

"또 만나세, 오늘처럼, 어제처럼, 어제의 어제처럼, 그 까마득한 옛날부터 지금까지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이 장소에서, 이 시간에. 그래서 그 동안 수없이 했던 얘기들을, 아니면 하지는 않았지만 지금껏 한 얘기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얘기들을 하세."

Cyber 중앙 손창원 기자 <pendor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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