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 군부, 무바라크를 버리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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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호스니 무바라크(Hosni Mubarak) 이집트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시위가 갈수록 확산되는 가운데 이집트 군이 지난달 31일(현지시간) “시위대에 무력을 사용하지 않겠다”고 발표했다.

정권의 핵심 지지기반이던 군의 이반으로 무바라크의 30년 철권통치는 치명타를 맞았다고 AP통신이 보도했다.

 이집트 국방부 대변인인 이스마일 에트만은 이날 국영TV에 나와 “군은 국민들에 대해 무력을 사용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사용하지 않을 것”이라며 “평화적인 표현의 자유는 모든 사람들에게 보장돼야 한다”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그는 “군은 국민 요구의 정당성을 인정한다”며 “그러나 시위대가 국가 안보를 해치거나 재산에 손해를 끼쳐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군은 지난달 25일 시위 발발 이후 수도 카이로 등에 진출해 치안 확보에 주력해 왔다. 시위대와는 물리적 충돌을 피해 왔으며, 일부 장병은 시위대에 가담해 무바라크 퇴진을 외치기도 했다. 시민들도 군인에게 생수병을 건네주며 “이드 와다(하나의 손)”라고 외쳤다. 군과 시민은 적이 아니라는 뜻이다.

  무함마드 엘바라데이(Mohamed El Baradei) 전 국제원자력기구(IAEA) 사무총장과 최대 야권단체인 무슬림형제단이 주도하는 반정부 시위대는 1일 카이로에서 무바라크의 사임을 촉구하는 대규모 시위인 ‘백만인 행진’을 열고 무기한 총파업을 선언했다. 반정부 시위대는 전날 엘바라데이를 대정부 협상 대표로 선출했다.

 오마르 술레이만 부통령은 지난달 31일 국영TV 연설에서 “대통령이 오늘 여러 정치세력과 개헌과 정치개혁 등 모든 이슈를 포함하는 대화를 즉시 시작하라고 요청했다”며 “대화의 결과 개헌안과 개혁 일정을 도출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대통령 출마 자격 완화와 공정한 선거는 반정부 세력의 주요 요구사항이다.

 무바라크는 반정부 시위 대책으로 내각 해산을 발표한 지 이틀 만인 이날 새 내각을 구성했다. 그러나 시위대는 “무바라크는 한 번 더 밀기만 하면 끝난다”는 구호를 외치며 퇴진을 압박했다. 미국도 개각에 시큰둥한 반응이다. 로버트 기브스 백악관 대변인은 “이집트의 상황은 개각이 아닌 행동을 요구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버락 오바마 행정부 관계자들은 무바라크의 앞날에 대해 공개적 언급을 회피한 채 익명을 조건으로 “무바라크가 오는 9월 대선에 출마하지 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미 국무부는 프랭크 위즈너 전 이집트 주재 미 대사를 통해 이집트 주요 인사들과 물밑 접촉에 나섰다. 필립 크롤리 국무부 대변인은 위즈너 전 대사가 이집트에 머무르고 있으며 현지 지도자들과 대화를 할 수 있다고 이날 밝혔다.

 각국 정부는 이집트에 거주하는 자국민을 철수시키거나 이집트 여행을 제한하는 등 보호조치를 서두르고 있다. 1일 카이로 국제공항에는 수천 명의 외국인이 특별기에 탑승하기 위해 한꺼번에 몰려드는 바람에 대혼잡을 빚었다. AP통신에 따르면 카이로 국제공항의 신축 3번 터미널에 몰려든 일부 승객들이 서로 격한 말다툼을 하거나 주먹질을 주고받는 일까지 벌어졌고, 창구 직원 부족으로 인해 혼란이 한층 가중됐다.

카이로=이상언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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