탱탱한 육질에 달콤새콤 … 껍질·설탕 끓이면 마멀레이드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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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호 10면

연말에 제주도에서 선물이 날아왔다. 열어보니 귤이 한 상자 가득 들어있었다. 서울 생활을 청산하고 제주도에 내려간 지인이었는데 올해 첫 수확을 한 모양이다. 연락을 그리 자주 하지 않아 감귤 농사를 시작한 것도 잘 모르고 있었는데 이렇게 선물까지 받고 보니 미안하고 고마웠다.
그가 보내온 귤은 무농약에 코팅도 하지 않은 귤이었다. 동봉한 편지에는 농약을 3년 정도 뿌리지 않으면 감귤 나무가 죽는 경우가 많아 오랫동안 무농약을 고집하기가 힘들다던데, 그래도 고집스럽게 농약을 안 뿌리고 키워보겠노라고 썼다. 이번 귤은 자신이 키운 것이 아니라 자연이 키운 것이라고 말은 했지만, 농약 주지 않고 풀 뽑아가면서 키우느라 고생깨나 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편지 말미에 “맛보시고 좋으면 주문해주세요”라고 써 있어서 냉큼 돈부터 부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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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약도 코팅도 하지 않은 귤은 한눈에 금방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외양부터 다르다. 시중에서 파는 귤들은 표면이 깨끗해 반들반들 윤기가 흐른다. 하지만 맛있는 과일은 인간만 맛있는 게 아니라 벌레들도 맛있어 하는지 유달리 병충해가 심하고, 농약 없이 키우기는 정말 힘들다. 나무 밑에 자라는 잡초들도 일일이 손으로 제거하기가 힘드니 제초제를 뿌려 깨끗하게 없애는 방식이 보편화되어 있다. 게다가 귤은 여기에 한 가지가 더 있다. 수확한 귤을 기름 성분이 있는 액체로 코팅해 윤기도 더하고 유통 중에도 덜 마르게 하는 것이다. 건조한 겨울 날씨에 오래 바깥 공기를 쐬어도 여전히 매끈하고 야들야들한 껍질을 유지할 수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보기에는 예쁘지만 그저 눈을 위한 것일 뿐 사람 입으로 들어가서 좋을 리는 없을 듯하다.

농약도 코팅도 하지 않은 귤은, 껍질에 윤기가 없고 거칠어진 갈색 흠집 부분이 많다. 때깔로만 보자면 입맛을 돋울 수 없는 귤이다. 집에 보관해도 껍질이 비교적 빨리 마른다. 하지만 이 못난이 귤이야말로 특별히 주문하지 않으면 맛볼 수 없는 진짜 건강한 귤이다. 상자 안에 든 귤은 크기도 들쭉날쭉하다. 선별기에 넣어 돌리지 않고 그냥 보냈으니 그럴 것이다. 껍질과 육질은 아주 탱탱하고 맛은 아주 진했다. 시중에서 파는 껍질이 홀랑 잘 벗겨지고 약간 말랑하고 신맛이 덜한 귤과는 맛이 아주 다르다.

귤을 좀 색다르게 먹고 싶으면 주스를 해 먹으면 좋다. 특히 귤이 상자에서 시들시들해지기 시작해 빨리 먹어 치우고 싶을 때는, 이렇게 녹즙기로 즙을 짜 먹는 것이 최고다. 녹즙을 먹겠다고 야무진 마음으로 사놓고는 주방의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녹즙기를 꺼내 귤즙을 짜 먹어보라. 시중에서 파는 오렌지주스는 먹고 싶지 않을 정도로 정말 신선하고 맛있다. 무가당 100% 오렌지주스라고 파는 것들도, 껍질까지 즙을 짜고 진한 맛을 위해 불에 졸이는 과정을 거친다고 한다. 그러니 씁쓸한 껍질 맛이 섞이고 맛은 독해진다. 그에 비해 집에서 짠 생주스는 독하지도 않으면서 시원하고 신선하다.

남아도는 귤은 귤잼을 해도 좋다. 껍질을 깐 귤을 믹서에 갈거나 가위로 대강 잘라 설탕을 넣고 끓인다. 다른 잼과 마찬가지로 처음에는 중불로 끓인 후 어느 정도 끓으면 약한 불로 천천히 저어가며 졸여야 한다. 기호에 따라 신맛이 더 좋으면 레몬즙을 더 넣기도 하는데,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무농약 귤이 매력적인 것은 껍질을 이용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귤껍질은 좋은 식품재료며, 진피라는 흔히 쓰이는 한약재가 귤껍질 말린 것이다. 단 농약이나 코팅한 귤껍질은 거의 이용할 수 없는데, 무농약 귤은 마음 놓고 이 좋은 귤껍질을 모두 먹을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이번에 무농약 귤을 받고 보니 알맹이보다 그 껍질이 더 탐이 났다. 빨리 껍질로 뭔가를 해보고 싶은 마음에 알맹이를 열심히 주스를 짜 먹었다.

무농약 귤껍질은 건조한 실내에서 아주 잘 마른다. 이를 뜨거운 물에 넣어 우려 마시는 것이다. 맛은 좀 밍밍하고 독특한 향을 즐기며 마시는 차다. 혹은 귤껍질을 채 썰어 설탕에 재어놓았다 뜨거운 물에 타 먹어도 좋다. 올해 내가 해보고 싶었던 것은 마멀레이드다. 며칠 동안 주스를 만들어 먹고 껍질을 모으니 한 바구니나 되었다. 껍질을 곱게 채 썰어 설탕과 함께 끓인 것이 마멀레이드다. 귤껍질은 물기가 적기 때문에 타지 않을 정도로 물을 넣어야 한다. 설탕은 잼을 할 때만큼 들어가는데, 처음부터 모든 양을 넣지 말고 후반부에 절반 정도를 넣는 것이 좋다. 설탕을 오래 끓이면 아무래도 맛이 탁해지기 때문이다. 마지막에 설탕을 넣을 때 남겨둔 귤주스도 함께 넣는다. 귤껍질은 신맛이 전혀 없고 향도 귤 알맹이와 다르기 때문에 귤 주스를 넣어 귤의 신맛과 향을 첨가해야 한다. 약한 불로 저으면서 끓이다 보면 이제 거의 다 되었다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육질에서 우러나온 즙이 설탕과 충분히 어우러져 끈적끈적한 느낌을 내면 완성된 것이다.

마멀레이드는 잼처럼 빵에 발라먹어도 좋고 요구르트에 넣어 먹어도 좋다. 특히 아무것도 가미하지 않은 플레인 요구르트는 특유의 발효유 향이 좀 거슬리는데, 귤껍질로 만든 마멀레이드는 향이 아주 강해 함께 섞어 먹으면 무척 잘 어울린다. 큰 유리병 하나 가득 마멀레이드를 해놓고 보니 뿌듯하기 이를 데 없다. 이 정도 양이면 여름까지 맛있는 요구르트를 먹을 것 같다. 정말 무농약 귤은 하나도 버릴 것이 없었다. 내가 농사를 짓지 않아도 마음 놓고 좋은 제철 재료를 권해주는 지인들이 새삼 고맙다.


이영미씨는 대중예술평론가다.『팔방미인 이영미의 참하고 소박한 우리 밥상 이야기』와 『광화문 연가』『 한국인의 자화상, 드라마』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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