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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구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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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우리나라 바보 캐릭터사(史)의 ‘지존’은 영구다. 1970년대 초 방영된 KBS 드라마 ‘여로’의 바보 주인공 말이다. 기계충의 흔적인 땜방머리, “땍띠(색시)야, 밥 줘”라는 혀짤배기 소리가 트레이드 마크였다. 영구를 앞세운 ‘여로’의 인기는 대단했다. 방영 시간엔 개도 문밖 출입을 삼갔고 부엌엔 밥 타는 냄새가 하염없이 퍼졌다는 우스개가 돌 정도였다. 아이들이 너도나도 바보스러운 짓을 흉내 내는 통에 “교육상 좋지 않다”는 여론도 들끓었다.

 영구는 80년대 말 ‘유머 1번지’의 개그맨 심형래에 의해 업데이트됐다. “영구 없다!”는 불세출의 유행어와 함께. 훗날 다른 개그맨들이 맹구, 상구로도 변주했다. 한국 대중문화에서 영구의 파워는 확실히 영구의 지능과 반비례했다. 바보 캐릭터의 유통기한이 긴 이유는 누구나 자신보다 약간 처지는 사람을 선호하기 마련인 인간 심리에 답이 있을 것이다. 90년대 중반 미국에선 ‘검프 신드롬’이 불었다. IQ 75의 지적장애인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 ‘포레스트 검프’가 대성공을 거두면서다. 당시 ‘검프’와 비교됐던 영화가 로버트 레드퍼드 감독의 ‘퀴즈쇼’다. 94년 평론가들로부터 ‘올해의 영화’로 칭송 받던 이 작품은 예상을 뒤엎고 흥행에 참패했다. ‘퀴즈쇼’의 주인공은 퓰리처상 수상자를 아버지로 둔 데다 젊은 나이에 명문대 교수가 된 ‘엄친아’였다.

 이 현상을 놓고 미국에선 “하이테크 시대에 낙오자가 되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이 심한 현대인들이 자신보다 현저히 못해 보이는 주인공들로부터 위안을 얻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힘을 얻었다. 잠시만 주춤해도 새로운 정보기술(IT) 기기, 신조어가 쏟아지는 세상에 부대낀 현대인들이 반(反)지성주의의 물결에 몸을 맡겼다는 얘기가 그럴듯하다. 할리우드에서 바보스러운 괴짜들이 사태를 악화시키는 소위 ‘너드 코미디(nerd comedy)’의 수명이 긴 이유도 비슷할 터다. 엄친아는 부러울지언정 벗하긴 불편하니까.

 심형래 감독이 할리우드 배우들과 촬영했다는 ‘라스트 갓파더’가 곧 개봉된다. 뉴욕 마피아 대부(godfather)의 숨겨진 후계자가 영구라는 기상천외한 설정이다. 지상파 뉴스 앵커가 성대모사를 할 정도로 ‘돌아온 영구’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이 영화가 흥행한다면 그만큼 시절이 피곤하다는 방증이려나. 많이 알기도, 잘나기도, 잘나가기도 피곤한 세상, 영구의 ‘띠리리리리리∼’하는 바보짓에 그저 다 잊어버리고 싶은 심사가 이해되지 않는 바도 아니다.

기선민 문화스포츠 부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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