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운드 넘버

중앙선데이

입력

업데이트

"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100’이나 ‘1000’처럼 ‘0’으로 끝나는 마디숫자(Round Number). ‘99에서 100’이든, ‘100에서 101’이든 그저 연속선상의 똑같은 미세 이동에 불과하지만 사람들은 그 차이에 웃고 운다. 마디숫자를 넘겼을 때 어떤 벽을 돌파했다는 자신감, 또는 새로운 미래를 연다는 희망 같은 걸 느끼기 때문일 게다.

경제학자들은 마디숫자가 경제적 효과를 유발한다는 연구결과를 내놓는다. 미 버클리대의 니콜 존슨 교수와 하버드대의 데빈 샨시쿠마 교수는 증시에서 마디숫자가 주가에 영향을 주는지를 2008년 연구했다. 그 결과 어떤 종목의 주가가 마디숫자를 넘긴 직후에 직전보다 평균 0.12% 더 올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미국 소매점들의 제품 가격표를 보면 10달러나 100달러짜리는 없고, 꼭 9.99나 99.99 등으로 끝난다. 길에 떨어진 1센트 동전을 줍지 않는 사람들이지만 가격표의 1센트 차이에는 무의식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경험칙에서 나온 상술이다.

이런 ‘마디숫자 효과’는 국내에서도 통하는 것 같다. 코스피 지수가 2000을 넘어선 뒤 주가상승 행보가 한결 빨라졌다. 펀드 환매가 주춤해지고, 시장을 떠났던 투자자들이 속속 복귀를 타진하는 모습도 엿보인다.

마디숫자의 해인 2010년, 한국 경제는 마디숫자 통계를 양산했다. 1인당 국민총소득(GNI)이 2만 달러를 다시 돌파하고, 국민총소득은 1조 달러를 넘을 전망이다. 국내총생산(GDP)과 상장사 매출액, 증시 시가총액이 나란히 1000조원을 돌파했다. 상장사 영업이익은 100조원을 넘어설 전망이다. 또 수출입 총액이 9000억 달러를 넘어선 데 이어 내년엔 꿈같은 1조 달러 시대가 열릴 모양이다.
반가운 숫자들이지만 속을 들여다보면 짙은 그림자도 깔려 있다. 날로 심해지는 경제력 집중이
그것이다. 전체 수출에서 4대 그룹이 차지하는 비중이 50%에 달하는 가운데 10대 그룹으로 넓히면 65%나 된다. 10대 그룹의 국민경제 기여도(공정위의 출하액 기준)는 60%선을 향해 이동 중이다. 증시 시가총액과 영업이익의 10대 그룹 비중은 이미 60%를 넘었다.

경제력 집중이 대기업들 탓은 아니다. 그들은 글로벌 시장에서 치열하게 싸워 놀라운 전과를 올리고 있는 공이 더 크다. 문제는 내수와 중소기업 부문의 낙후성이다. 한쪽 발로 뛰는 파행 상황에서 자칫 수출 대기업 쪽에 큰 탈이 난다면 한국 경제는 한순간에 쓰러질 수 있다. 실제 몇몇 대기업이 글로벌 시장의 변화 트렌드를 놓쳐 고전하고 있지 않은가.

걱정스러운 것은 정부의 안일한 대응이다. 다른 한쪽 발을 서둘러 보강하겠다는 의지를 접은 듯하다. 영리 의료법인 설립을 끝내 허용치 않기로 한 게 대표적 사례다. 의료·관광·금융·소재부품 등 내수 서비스업과 중소기업 부문이 경쟁력을 키울 환경을 좀체 만들어주지 못하고 있다. 수출 대기업은 아예 없다는 각오로 미래의 먹을거리를 준비할 수는 없을까? 그들이 계속 잘해주는 것은 덤으로 생각하면서 말이다.

김광기

중앙SUNDAY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