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28)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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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밝은 눈 8

“이 나무, 아직 살아 있다고 들었어요. 새 가지가 뻗어 나왔다고. 맞나요?”
“…맞아요.”
‘키킥’을 간신히 참았으나 이번엔 뜨거운 것이 목젖을 치고 올라왔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에는 나와 달리, 서기(瑞氣)가 떠올랐다. 새로 자라난 가지가 어떻게 생겼느냐고 그녀가 물었고, 나는 더듬더듬 팔뚝만 한 새 가지와 그것이 새끼 친 더 작은 가지들의 모양을 설명해주었다. 새 가지들이 운악산을 향해 뻗어 있다는 내 말을 듣고 그녀는 웃었다. 바람이 조금 불었고, 억새들의 날개가 흔들렸다.

“새로 난 이 가지도 순-놈이겠지요? 엄마가 순-놈이니까”
그녀는 덧붙였다.
밝아진 기억의 회로에서 비로소 열네 살의 소녀와 스물아홉 살 지금의 그녀 목소리가 완전하게 합쳐졌다. 슬픔이 차올랐다. 그녀의 목소리는 거의 변한 것이 없었으나 내 목소리는 아주 탁한 쉰 소리로 변해 있었다. 그녀가 내 목소리를 알아보지 못하는 건 너무도 당연했고, 또 다행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슬픔의 우물이 내 안에서 빠르게 깊어지고 있었다.
“여, 여기 살았던 집, 어떻게 됐나요?”
슬픔을 이기려고 내가 짐짓 활달한 척 물었다.
“그게…… 불이…… 났었어요…….”

그녀의 표정이 갑자기 어두워졌다.
불이 난 것은 한밤중이었다. 나의 기억은 완전히 회복되어 있었다. 생생했다. 관음봉 정상 부근의 바위틈에서 나는 처음 불길을 보았다. 그 시절의 나는 산에서 자는 일도 많았다. 집 안 전체에 깊숙이 배어 있는 개 냄새는 동네 사람들만 싫어한 것이 아니었다. 더구나 저물녘 있었던 일로 해서, 나는 그날 밤 절대 집에 있고 싶지 않았다. 산에서 비박을 하고 있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집을 영원히 떠날 때가 왔다고 생각했다.

버스정류장에서 하교하는 여린을 만났다가 그녀의 아버지에게 들킨 것이 화근이 되었다. 내가 딸과 함께 있는 걸 확인한 그녀의 아버지는 길길이 날뛰기 시작했다. 맹인이었으나 힘이 장사였다. 목덜미가 단번에 그이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단단하고도 모진 힘이었다. 맹인용 지팡이가 우박처럼 머리 위로 떨어졌다. ‘더러운 개백정 새끼!’가 ‘감히 우리 딸을……’이라고, 그이는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가을이 깊어질 무렵이었다.
오누이처럼 가까워진 나와 여린의 관계를 눈치챈 그이는 처음부터 아마 불길하고 기분 나쁜 어떤 예감을 느꼈을지도 몰랐다. 봄부터 여름까지 ‘무허가 개백정 집을 철거시키라’면서 동사무소, 구청, 시청으로 종횡무진 쫓아다닌 이유도 거기 있었다. 집요하고 어떤 의미에선 잔인한 사람이었다. 어린 딸이 아무리 울부짖어도 그이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개백정집’은 어차피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기 때문에 몰려선 사람들도 모두 구경만 할 뿐이었다. ‘개백정집 아들이라면 맞아도 싸다’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묵계였다. 맹인용 지팡이에 맞아 터진 머리에서 피가 철철 흘렀다. 집으로 들어가지 않고 산에서 비박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

불이 난 것이 하필이면 그날 밤이었다.
처음엔 내 집에서 불이 난 줄 알았다. 암벽 사이에 은신한 채 나는 불길이 타오르는 것을 그냥 내려다보고만 있었다. 나의 집이 불탄다고 생각하자 짜릿한 쾌감이 온몸에 흘렀다. 개들도, 아니 아버지까지 모조리 불타 없어진다고 해도 슬픔은커녕 속이 후련할 것 같았다. 그러나 다시 보니, 불타고 있는 집은 내 집이 아니라 여린의 집이었다. 암벽 틈을 박차고 나왔다.
“오, 안 돼!”
나는 입속으로 부르짖었다.

세상이 통째로 불타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눈 한번 꿈쩍이지 않을 만큼 내 안의 증오심이 깊었으나, 그녀만은 예외였다. 내가 살아 있어야 할 단 하나의 이유가 바로 그녀에게 있었다. 언젠가, 내 안의 증오심을 견디어내고, 마침내 그것을 넘어 나의 인격을 높이고 심성을 견실케 하여 보다 높은 세계로 이행하고자 하는 일말의 희망도 그녀로부터 나왔다. 그녀가 없다면 내가 구제할 길 없는 어둠의 짐승이 되리라는 예감은 강력하고도 끈질겼다. 그러므로 그녀를 구하는 것은 명백히 나를 구하는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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