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손은 말굽으로 변하고 (1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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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 김영진, heakwan@ymail.com

505호실 여자 6

어쩐다?
나는 해지는 쪽으로 잠시 고개를 돌리고 생각했다.
이곳에서 멀리 내다보이는 것은 서쪽 방향뿐이었다. 화사한 놀빛이 눈에 들어왔다. 큰 강이 도시의 서남부를 휘감고 있었다. 도시와 강의 경계는 분명하지 않았다. 놀빛이 모든 것을 품에 안아 한 덩어리로 비벼낸 것 같은 광경이었다. 선홍빛 놀빛은 빠르게 암갈색으로 변할 것이고 금방 어둠으로 바뀔 터였다. 어두울 때까지 기다린다면 사람과 맞부딪치지 않고 들어갈 수 있었다. 그러나 내려다보이는 사람은 분명히 여자였다.

나는 잠시 망설이다가 소리를 내지 않고 암벽을 내려왔다.
만약 파라솔 밑에 앉아 있는 게 505호실의 맹인 안마사 여자라면, 얼굴을 볼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암벽 밑은 잡목들이 빽빽했고, 길은 없었다. 발밑에서 막 떨어진 젊은 낙엽들이 청명한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아무리 조심스럽게 걸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가시덩굴에 팔이 씻겼고 피가 조금 배어나왔다.

여자는 놀빛을 향해 앉아 있었다.
잔디밭으로 이어진 쪽문 앞에 와서야 여자의 얼굴이 사선으로 보였다. 여자가 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두 눈은 캄캄했으나 표정은 밝았다. 외출했다가 돌아오는 길인지 연보라 머플러에 흰색 버버리코트를 입은 정갈한 차림새였다. 맹인용 지팡이가 탁자 모서리에 세워져 있어 나는 여자가 505호실 맹인 안마사라는 걸 금방 확인할 수 있었다.

“거기, 누구세요?”
여자가 좀 수줍은 듯한 어조로 물었다.
“아, 저…… 새로 온 관리인입니다.”
“예에. 밖에서 들어오다가…… 놀빛이 너무 좋아서요…….”
뜻밖에, 여자는 스무 살 처녀처럼 젊은 얼굴이었다. 놀이 어느새 짙어져 이미지로만 느끼고 보았기 때문일는지 몰랐다. 말하고 나서 여자는 가만히 웃었다. 잇속이 하얬다. 하얗다고 느꼈다. 환하면서 고요한 미소였다. 따뜻한 물에 손가락을 담갔을 때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여기에서 보는 놀은 언제나 진짜 황홀해요.”
여자는 정말 놀빛을 세세히 본다는 듯 말했다.
“오늘 워낙 날씨가 좋아서요.”
“아저씨는, 산을 잘 타시는가 봐요. 바위도 막 기어 내려오시고…….”
“바위라니요, 그냥 뭐, 산책했는걸요.”
“저도 산, 알아요. 아는 사람 중에 산을 잘 타는 사람이 있었거든요. 그리고요, 제 귀요, 아저씨 눈보다 더 밝을지 모르니까 거짓말하지 마세요. 아저씨는 분명히 저쪽 큰 바위를 날렵하게 타고 내려왔어요. 경사가 이런 바위요.”
여자가 손바닥을 세워보였다.
“그걸 어떻게…….”

“바위를 봤냐구요? 그럼요. 예전에도 이 동네 살았는걸요.”
여자는 아마 후천적으로 맹인이 된 모양이었다. 새떼들이 우르르 여자의 등 뒤로 지나갔다. 운악산 깊은 골짜기로부터 어둠이 스멀스멀 피어올라 점령군처럼 빠르게 진군해오는 중이었다. 여자가 이윽고 지팡이를 찾아들고 앉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언, 언제…….”
내가 더듬거리자 여자가 또 따뜻하게 웃었다.
“언제부터 앞을 못 봤냐고요? 미안해하실 건 없어요. 오래, 천천히 나빠졌지요. 계속 나빠지고 있는 중인걸요. 지금은 윤곽이 어릿어릿해요. 얼굴이야 볼 수 없지만요, 사람과 자동차는 구별할 수 있어요. 바람 끝이 차가워진 게, 벌써 어두워졌나 보네요.”
“아, 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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