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RA, 독립군 이미지 상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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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영국 북아일랜드 지역의 공화파 군사조직인 아일랜드공화군(IRA)이 파렴치한 범죄조직으로 전락했다는 비난을 받고 있다. IRA는 8일 조직원이 저지른 살인 사건에 대해 엽기적인 성명을 발표했다. "살인 사건 피해자 가족에게 '당신의 동생을 죽인 우리 조직원을 총살시켜 주겠다'며 사건을 무마하려 했다"고 스스로 밝혔다. 피해자 가족들은 "우리는 보복보다는 법에 따라 처리하기를 원한다"며 거절했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IRA의 폭력성을 규탄하는 비난이 쏟아지고 있다. IRA는 1919년 탄생한 민족해방운동 독립군 조직이다. 그러나 IRA는 지난해 말 영국 내 최대 은행강도 사건의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돼 비난을 받아왔다. 그러다 이번에 살인 사건 파문까지 겹쳤다.

지난달 30일 북아일랜드 주도인 벨파스트 시내 술집에서 IRA 조직원들이 시비 끝에 30대 청년을 칼로 찔러 살해했다. 이들은 목격자들을 위협하고 현장을 찍은 폐쇄회로 TV 필름을 빼앗아 달아났다. 경찰도 IRA의 위세에 눌려 흐지부지 넘어갈 분위기였다. 그러자 청년의 여자 형제 5명이 범인 색출에 나섰다. 벨파스트 시민들이 동조했다. 영국과 아일랜드 총리도 IRA를 비난했다. IRA를 대변해온 정치 조직인 신페인당이 무마하기 위해 범죄에 연루된 조직원의 명단을 경찰에 넘겼다.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이 결정타를 날렸다. 부시가 아일랜드 최대 축일인 성 패트릭스 데이(17일)에 다섯 자매를 초대했다. 부시는 IRA의 휴전 선언 이후 95년부터 매년 초대해온 신페인당 관계자는 부르지 않았다. 미국이 평화협상을 위해 감싸온 신페인당과 IRA를 버리겠다는 명백한 신호였다. 급해진 IRA는 피해자 가족에게 '성의'를 보였다는 사실을 알리기 위해 성명을 냈다. 그러나 여론은 거꾸로 돌아갔다. IRA의 몰락과 함께 북아일랜드의 평화는 다시 기약 없이 멀어지고 있다.

런던=오병상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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