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왕시, 항복하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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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제9회 삼성화재배 세계바둑오픈 결승1국
[제15보 (166~175)]
黑 .이세돌 9단 白.왕시 5단

어둠이 찾아오고 대국장 주변은 쥐 죽은 듯 고요하다. 그 속에서 없는 수를 찾아 광야를 헤매는 왕시(王檄) 5단의 고통과 탄식이 유령처럼 맴돌고 있다. 간간 초 읽는 계시원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왕시를 무정하게 재촉하는 소리다.

이세돌 9단은 대마를 끌고 도주하다 말고 흑?로 씌워 역습해 왔다. 공격이 최상의 수비란 말 그대로 이 위력적인 역습에 왕시의 대응방법은 보이지 않는다. 166, 168, 170으로 이리저리 뚫어봤지만 결국은 172로 연결하지 않을 수 없다. 172는 패전을 인정한 것이고 실질적인 항복을 의미한다. 여간해서 표정변화가 없던 왕시도 이 수를 두면서 얼굴이 저녁 노을처럼 붉게 달아오르고 만다.

만약 172로 연결하지 않으면 '참고도' 흑1, 3으로 중앙 백 대마가 함몰한다. 백4에 이어 6으로 나오는 수가 있는 듯 보이지만 흑7의 응수로 그만이다.

▶ 참고도

172의 연결을 보자 이세돌은 비로소 173으로 대마를 살려낸다. 흑 대마가 살아갔다는 것은 '백의 죽음'을 의미한다. 우선 A로 두면 상변 백 대마가 잡힌다. 좌상 귀도 B로 두면 사활에 걸려든다. 이처럼 화급한 상황을 놔둔 채 왕시가 좌변 흑 대마 공격에 총력을 기울인 것은 이 대마를 잡으면 모든 근심과 설움이 다 해결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흑 대마가 살아가버렸고 희망은 없다. 왕시는 쓸쓸히 174를 선수해 보더니 돌을 거뒀다. 수많은 공격이 있었고 전투가 있었다. 그러나 왕시는 너무 많은 변화 속에서 비몽사몽이 되어버렸다. 이건 '내 바둑이 아니다'고 왕시는 생각하는 듯 한동안 판을 내려다보며 말이 없었다. 잠시 후 이들은 판을 쓸지도 않은 채 손가락으로 복기를 시작했다.

박치문 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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