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중앙 시평

시작과 종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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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1면

꼭 지난해 이맘때였다. 3월 눈 치고는 폭설에 가까운 푸짐한 눈이 오고 나서 마당에서 첫 봄꽃을 보았었다. 복수초였다. 노란꽃 주위로만 동그랗게 눈이 녹아 흙이 피워낸 게 아니라 눈이 피워낸 꽃처럼 신기했다. 올해도 3월 눈이 오길래 복수초를 피우려 오는 눈처럼 반가워 그 자리에 나가보아도 아직은 아무런 기별이 없다.

올해는 유난히 겨울이 길어 꽃도 예년보다 열흘가량 늦게 피리라고 하니 기다려야겠지만 저지른 일이 있어 안심이 안 된다. 썩어서 내려앉은 노천마루를 새로 놓는 공사를 지난달에 했는데, 복수초가 있던 자리는 인부들이 드나드는 통로가 되었다. 그 좁은 길에는 복수초뿐 아니라 수선화 뿌리도 잠들어 있다. 나는 일하는 사람들한테 그 길을 피해 다녀달라는 부탁을 차마 하지 못했다. 그들이 불편해할 것이 눈치 보여서였다.

눈을 녹여가며 꽃을 피울 수 있는 건강한 생명력도 사람한테 짓밟히면 못살아날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든다. 그러나 어쩔 것인가, 더한 것들도 생성하고 소멸하는데. 봄이 좀 늦은들 또 어떠리. 씨뿌릴 날이 멀지 않은데. 지난해 가을에 받아놓은 일년초 씨를 갈무리해놓은 봉지를 꺼내본다. 거의가 집마당에서 받은 것들이지만 여행 중 시골길에서 발견한 야생초의 씨도 있다. 마구 뿌리지 말고 올해는 키나 빛깔, 개화시기를 고려해 조화롭게 뿌려야지 하고 벼르면서 언제쯤이 좋을까, 해토하고 씨뿌릴 수 있는 날이 기다려진다.

지난해에 그 씨들을 받을 때는 씨가 생명의 종말이더니 올해에 그것들을 뿌릴 때가 되니 종말이 시작되었다. 그 작고 가벼운 것들 속에 시작과 종말이 함께있다는 그 완전성과 영원성이 가슴 짠하게 경이롭다. 좁은 마당에 다 뿌리기엔 너무 많은 씨지만 나중에 솎아줄 요량으로 다 뿌릴 작정이다. 씨를 맺은 이상 푸르고 예쁜 싹으로 돋아나 단 며칠이라도 햇빛을 누리게 하고 싶다. 아무리 일찍 씨를 뿌린다 해도 땅 속에서 그것들이 고개를 내밀기 전에 목련을 시작으로 꽃나무들이 먼저 다투어 꽃을 피워낼 것이다. 꽃그늘에 친한 친구들을 차례로 초대해 묵은 김치를 안주로 술잔을 기울일 수 있다면 올 봄이 비록 짧다고 해도 찬란한 봄이 될 것이다. 도시에 사는 친구들은 틀림없이 나의 시골생활을 부러워할 것이다.

그러나 도시 근교의 시골생활이라는 것이 숲과 개울물이 이런 저런 명목으로 야금야금 훼손되고 오염되는 것을 빤히 바라보면서 견디어내는 일이라는 것을 그들은 모르리라. 나도 미처 몰랐으니까. 그러나 나는 남들이 나를 부러워하는 것을 좋아하는 속물이니까 그런 사실을 발설하지는 않을 것이다. 속물은 조금쯤 비겁하게 마련이다. 비겁하기만 한 게 아니라 내 마당이라도 안전하면 그만이라고 이기적이 되는 것도 속물근성이다.

도시도 그렇겠지만 비나 눈이 갠 후의 시골공기는 절로 탄성이 나올 만큼 투명하다. 집에서 한강이 바라보이는데 공기에 따라 멀리 보였다 가까이 보였다 한다. 녹차를 한 잔 우려내 가지고 한강이 보이는 창가로 가니 강물이 햇빛에 부서지는 것까지 보인다. 얼어붙은 위로 눈이 쌓였을 때는 설원처럼 보였었다. 얼어붙었던 한강이 풀리는 것을 보는 게 나에게 해마다 감동스러운 것은 서정주의 '풀리는 한강가에서'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강물이 풀리다니 / 강물은 무엇하러 또 풀리는가' 로 시작하는 시를 나는 다 욀 수 있지만 특히 '무어라 강물은 다시 풀리어 / 이 햇빛 이 물결을 내게 주는가' 에 이르러서는 마음이 떨린다. 굳었던 마음이 떨리고 풀리고 촉촉해지는 느낌이 나에게 온다는 건 봄이 오는 느낌 못지않게 반갑다. 서정주 시인이 생전에 겪은 칭송과 폄하, 영예와 치욕에 동의하여 고개숙인 적도 침뱉은 적도 없지만 어느 한 계절도 그의 시를 떠올리지 않은 계절이 없다. 그만큼 자연과 계절의 마음과 통하는 많은 시를 남기셨고, 그런 시들은 그 분이 겪은 이승의 영욕을 뛰어넘어 살아남아 사랑받고 있으니 그 분의 영혼도 그만하면 족하다고 끄덕끄덕 미소 지으시지 않을까.

박완서 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