씩씩한 자스민 … 다시 세상 속으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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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월 사고로 남편을 잃은 필리핀 출신 한국인 이(李)자스민씨가 19일 서울 광화문 해치광장 강연회에서 강연을 하기 위해 강단으로 나가고 있다. [오종택 기자]

이(李)자스민(33·여)씨가 19일 서울 광화문 해치광장에 섰다.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기념해 문화체육관광부와 서울시 주최로 열리는 명사 릴레이 강연 ‘대한민국 선진화, 길을 묻다’에 강사로 나온 것이다. 지난 1일부터 30일까지 이어지는 강연에는 주철환 중앙미디어그룹(JMnet) 제작본부장, ‘한국의 스티븐 호킹’으로 알려진 이상묵 서울대 교수, 지휘자인 금난새씨, 가수 션, 구호사업가 한비야씨 등이 강사로 초청됐다.

 필리핀 출신의 자스민씨는 1996년 한국인과 결혼해 국내에 정착했다. 다문화 가정과 관련된 다양한 활동을 해온 그는 방송과 강연·번역 등 다양한 활동을 하고 있다. 지난 8월 그녀에게 슬픈 일이 있었다. 남편 이동호(45)씨가 딸을 구하려다 물에 빠져 숨졌다. <본지 8월 10일자 17면>

 이씨와 사별한 뒤 자스민씨는 공식 활동을 모두 접었다. 불면증과 거식증이 찾아와 56㎏이던 몸무게가 한 달 만에 40㎏대 중반까지 줄었다. 자스민씨를 다시 일으켜 세운 건 두 자녀였다.

 8월 하순 개학을 하자 자스민씨는 억지로 몸을 일으켜 승근(14)이와 승연(11)이를 챙겨 학교에 보냈다. 그녀는 “아이들을 보내면서, 남편 사후 처음으로 허기를 느꼈다.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구나, 이렇게 누워만 있으면 안 되겠구나 생각했다”고 말했다. 그렇게 다시 수저를 들었고 살도 조금씩 붙었다.

 10월부터는 방송과 통역 일도 시작했다. G20 선진화 강연 주최 측은 자스민씨에게 강연을 요청했고, 그녀도 받아들였다. 그녀는 이날 강연에서 ‘목욕탕 아줌마론(論)’을 이야기했다.

 한국에서 가장 낯선 장소는 목욕탕이었다. 전혀 모르는 사람들 앞에서 옷을 벗고 몸을 씻는 문화가 처음엔 큰 충격이었다. 탕 밖으로 나올 수조차 없었다. 그때 어떤 아줌마가 자스민씨의 팔을 톡톡 두드렸다. 등을 가리키며 “때 밀어줄게요. 나도 밀어주고”라고 했다. 목욕을 하고 나온 자스민씨에게 아줌마는 매실 차를 건넸다.

 “목욕탕은 한국이고, 아줌마는 한국 정부이자 국민”이라고 자스민씨는 말했다. 낯선 곳에 온 이들과 어떻게 소통할 것인지를 이 아줌마가 잘 보여줬다고 그녀는 덧붙였다. 열 가구 중 한 가구는 ‘다문화 가정’이 될 20년 후에 대해, 그리고 선진국에 접어든 한국 사회의 배려와 존중에 대해 이야기한 것이다.

글=강인식 기자
사진=오종택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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