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설

누구를 위해 FTA 재협상을 요구하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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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4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정략(政略)의 수단인가. 세계가 가히 경제 전쟁이라고 할 만큼 경제적 이익을 위해 치열하게 각축을 벌이고 있는 마당에 일부 야당 의원들이 정치적 이해만 앞세운 처신들을 보이고 있어 걱정이다. 32명의 야당 의원들이 7일 한·미 FTA 재협상을 요구하며, 이 협상 비준(批准)에 반대하는 미국 의원들과도 연대해 싸우겠다고 밝혔다. 민주노동당·창조한국당·진보신당이야 그렇다 해도 민주당의 정동영·천정배·박주선·조배숙 최고위원까지 가세한 것은 어이가 없다.

이들은 공동성명에서 “재협상을 통해 투자자-국가 분쟁 제도, 제외품목 열거 방식의 서비스 개방 조항 등 독소조항을 반드시 제거해야 한다”며 전면 재협상을 요구했다. 그렇지만 이들이 연대하겠다는 미국 쪽 의원들은 한국에 자동차·쇠고기·섬유 등에 더 많은 개방을 요구하고 있다. 이들과 무엇을 어디까지 연대하고, 무엇을 얻겠다는 것인지 이해할 수가 없다. 전면 재협상에 들어가면 결국 어렵게 합의해 놓은 합의안을 미국 측에 유리하게 고칠 수 있는 길만 열어 주게 된다. 오죽하면 정세균 전 민주당 대표마저 “재협상을 하면 지금보다 더 좋은 결과가 나올 수 있다고 장담할 수 있느냐”고 물었겠는가.

더군다나 어제 민주당 손학규 대표는 이재오 특임장관을 만난 자리에서 “미국이 현재 의원들을 중심으로 자동차·쇠고기·섬유 부분에서 재협상을 주장하고 있다”면서 “밀실(密室)협상으로 대폭 양보하려는 것 아니냐”고 따졌다. 이렇게 말로는 국익을 내세워 정부를 압박하면서도 미국의 이익을 관철할 재협상의 기회를 마련해 주겠다는 발상이 어떻게 나올 수 있는지 궁금하다. 결국 미국 내 강경파와 손잡고 한·미 FTA 자체를 무산시키겠다는 의도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 이렇게 진정성이 결여된 상태에서 ‘독소 조항’ 운운하는 것도 협정 체결을 방해하려는 구실이라고 보지 않을 수 없다. 설득력을 가지려면 먼저 한·미 FTA가 필요하다는 점은 인정하는 것인지, 반미운동에 동조하는 것은 아닌지부터 분명히 밝혀 주기 바란다.

무역의존도가 높은 경제구조를 가진 한국에서 무역 장벽을 낮출 FTA가 절실하다는 원론적 주장은 여기서 다시 반복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무엇보다 한·미 FTA는 민주당이 집권하고 있던 2007년 노무현 정부가 합의한 내용이다. 정동영·천정배 최고위원은 그 정부에서 장관까지 지낸 사람이다. 그런데도 정부가 바뀌자 ‘독소조항’이라며 비난하고 있으니 누워서 침 뱉기다. 당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은 비준을 요구하는데, 민주당이 시간만 끌고 있는 것도 무책임하기 짝이 없다.

한·미 FTA는 양국 간에 합의된 내용이다. 미국이 선거를 앞두고 이를 이용하려 하더라도 현명하게 설득해 최소한의 조정에 그쳐야 한다. 그리고 가능한 한 빨리 비준이 이뤄지도록 여야가 힘을 모아야 할 시점이다. 우리처럼 강대국에 둘러싸여 무역에 의존해야 하는 나라에서 외교나 안보 문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하면 나라가 뿌리부터 흔들리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