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시론

사법부의 정책 개입 정당한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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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장기간 법정공방을 펼친 새만금 사건의 제1심 판결이 나왔다. 재판부가 사실상 원고승소 판결을 내려 새만금사업을 둘러싼 논란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게 됐다. 판결이 가져올 후폭풍에 대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오늘의 일자리보다 미래세대의 환경을 우선시한 결정인 만큼 담당 재판부의 마음고생을 능히 짐작할 수 있다. 사실 법원은 고도성장 과정에서 소외된 사람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아 왔다. 이들의 희생에 애써 눈감은 법원이 있었기에 정치인.관료.대기업의 지배연합이 비공식 네트워크를 통해 대한민국 경제를 이륙시킬 수 있었던 것이다. 그동안 경시되어온 가치를 대변하는 판결을 하면서 법원이 느끼는 감회는 남달랐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번 판결을 대하면서 미국의 연방대법관 스칼리아의 고언(苦言)을 상기하지 않을 수 없다. 1960~70년대에 불길처럼 일어나던 '사법 적극주의'를 겪은 선험자의 반성을 들을 수 있기 때문이다. 스칼리아는 충고한다. 민주적 정당성을 갖지 못한 법원은 다수의 횡포로부터 소수자인 개인을 보호하는 본연의 기능에 머물러야 하고, 다수의 이익을 보호하기 위해 입법권과 행정권의 행사에 관여하는 역할을 해서는 안 된다고 말한다. 삼권분립의 원칙에 입각한 정부의 시스템은 다수결에 의해 결정된 정책의 집행으로 개인이 피해를 보았을 때 비로소 법원이 나서게 함으로써 정치적 소수자를 다수의 전횡으로부터 보호한다는 것이다.

판사가 개인의 권리를 잘 보호해 왔다면 다수의 이익도 보호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 도대체 무슨 문제란 말인가. 스칼리아는 자신있게 대답한다. "그러한 종류의 일을 사법부가 잘 처리할 것이라는 보장이 없으며 기실 판사들은 그런 종류의 일을 잘 처리하지 못하도록 자리 매김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판사는 전체 국민보다는 소송당사자를, 구체적 결과보다는 추상적 원칙을 더 중요하게 여기게 하는 교육을 받아 왔다. 또한 자신의 판결에 대해 유권자인 국민에게 어떠한 책임도 지지 않는다. 이러한 소수 엘리트 집단이 '무엇이 그 사회의 모든 국민에게 좋은지를 결정하도록 하는 것'은 스칼리아에게는 생각만 해도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의사당에서 결정된 중요한 입법 목적이 정부기관에 의해 무시되고 잘못 수행되는 경우에도, 그로 인한 피해자가 없다면 법원은 방관만 하고 있어야 하는가. 이에 대해 스칼리아는 "물론"이라고 대답한다. 나아가 스칼리아는 이와 같이 행정부가 특정 법률조항을 실제로 집행하지 않는 것이 민주적 정치과정상 정당할 뿐만 아니라 '바람직한' 현상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비록 판사실에서만 근무하는 판사로서는 깨닫기 쉽지 않겠지만, 어제는 시대를 앞서가는 선구자로 칭송받던 사람이 오늘에는 따분하고 한심한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러한 법을 폐기시킬 수 있는 능력이 사회를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될 수 있으며, 이에 반대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보수주의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잘난 정치과정이 실패할 때 법원 이외에 어디다 호소할 수 있는가. 스칼리아는 민주적인 정치과정이 존재하는 이상 그것이 항상 실패한다고 가정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주장한다. 정치과정이 실패할 때도 물론 있을 것이다. 하지만 법원이 그 실패를 적시에 인식할 수 있는 능력과 자원을 갖추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또한 법원이 개입한다 해서 더 좋은 결과가 나온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스칼리아는 여럿이 참여한 가운데 내린 공동결정이 판사의 외로운 결단보다 실패할 확률이 적다고 본 것이다. 스칼리아의 고언에 대한 우리 법원의 성찰을 기대해 본다.

조홍식 서울대 법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