깃대 들고 다음 홀로 간 '건망증 골퍼'

중앙선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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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선데이, 디시전메이커를 위한 신문"

“상계동 더블!”
K는 그날 호기롭게 외쳤더란다. 고주망태가 되도록 술을 마셨던 게 화근이었다. 간신히 택시에 올라탄 K는 몇 번씩이나 행선지를 확인하는 택시기사에게 화를 벌컥 내고 잠이 들었더란다. 문제는 그가 그날 대전 출장 중이라는 사실을 잊고 있었다는 것이다. K는 다음 날 대전에서 일정이 있었는데도 술이 취한 나머지 평소처럼 택시를 잡아타고 대전에서 서울 상계동까지 왔더란다.

K처럼 술을 즐기는 편은 아니지만 건망증이 심한 건 나도 마찬가지다. 이를테면 이런 경우다. TV 리모컨을 냉장고나 장롱 속에 넣어두고 찾아다니는 건 늘 있는 일이다. 휴대전화를 손에 들고서 ‘내 전화기가 어디로 갔나’ 숨바꼭질을 하는 경우도 있다. 자동차 열쇠를 승용차 트렁크 안에 놓고 문을 잠그는 건 사건도 아니다. 공항에선 항상 탑승권을 어디다 뒀는지 몰라서 허둥지둥하곤 한다. 건망증은 주위 사람에게 전염이 되기도 하는 모양이다. 멀쩡하던 아내가 요즘 들어 건망증이 부쩍 심해졌기 때문이다. 지갑을 집 안에 놔두고 외출하는 건 애교로 봐줄 수도 있다. 전화기나 열쇠를 두고 현관문을 나섰다가 돌아오는 일은 일상 다반사다. 그래도 아내는 자기는 정상이라고 주장한다. 잠자리에 들기 전 클렌징 로션까지 바르고 정성스럽게 세안을 한 뒤에 다시 화장대 앞에 돌아와 파운데이션을 꼼꼼히 펴바르는 여성도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건망증이란 것이 골프장이라고 비켜갈 리 없다. 내 경우 골프장에서 세 가지 이상의 물품을 한꺼번에 간수하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예를 들어 장갑과 티펙 등을 넣은 손가방과 휴대전화, 그리고 공 한 더즌을 들고 나갔다고 치자. 중간에 들렀던 화장실 변기 위에 알토란 같은 공 한 박스를 두고 나온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여기에 모자와 비옷까지 챙겨야 한다면 내 머리는 혼란을 일으키기 시작한다. 골프를 할 때 준비물은 왜 그렇게 많은가. 모자와 티펙에 그린 마크 정도는 필수품이다(골프화도 빼놓을 수 없는 준비물이다. 골프화 대신 운동화를 신은 채 필드에 나섰다가 황당해했던 경험도 있다). 한여름 철엔 선크림과 팔토시 등도 챙겨야 한다. 날씨가 시시각각으로 변하는 요즘 같은 날씨엔 비옷과 우산도 없으면 불편하다. 언제 어떤 전화가 올지 모르니 휴대전화도 잊지 말아야 하고, 동반자들과 내기를 하기 위해선 지갑도 빠뜨리면 안 된다. 매너 좋은 골퍼가 되려면 그린 보수기도 지참해야 한다. 여기에 최근 들어서는 목표 지점까지 거리를 알려주는 GPS장비도 나왔다. 이것만 놓고 봐도 골프를 하기 위한 준비물이 10개를 넘는다. 나는 이렇게 많은 물품을 한꺼번에 챙길 자신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소지품을 흘리고 다니는 게 끝이 아니다. 최근엔 또 다른 건망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라운드 도중 그린에서 깃대를 뽑아 들고 다음 홀로 이동하다가 황급히 되돌아선 경험도 있다. 우산과 드라이버를 들고 티잉 그라운드에서 내 차례를 기다리다가 드라이버를 던져버리고 우산을 들고 티박스에 오르기도 한다. 클럽 하우스에선 음식을 기다리다가 웨이트리스에게 이렇게 묻는다. “좀 아까, 내가 뭘 시켰수?”

J-GOLF 취재본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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