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쟁명:유주열] 劉公島와 “포트 에드워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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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산동성 웨이하이(威海)에는 매년 9월17일을 의미있는 날로 기억하고 있다. 지금부터 116년전 위하이의 劉公島에서 출진한 淸國의 북양해군이 황해(서해)해전에서 일본에 패배하고 돌아 온 날이다. 최근 찾아가 본 위하이 劉公島에는 주룩 주룩 비가 내리고 있었다. 박물관에 전시된 당시의 함포도 비에 젖어 녹물이 흐르면서 희생된 북양해군 장병의 눈물인 양 느꼈다.
1894년 조선의 동학난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일본과 청국이 한반도에 출병하여 대립한다. 8.1 일본이 청국에 대해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청일전쟁(갑오전쟁)이 개전된다. 일본군은 평양회전 승리의 여세를 몰아 황해의 제해권을 노렸다. 일본으로서는 당시 아시아 제일의 해군력을 가졌다는 북양해군과 일전이 불가피하였다.
9월17일 정오경 압록강 하구에서 멀지 않은 황해에서 양국의 해군이 조우하였다. 당시 청국의 북양해군사령관이었던 丁汝昌은 동양최대의 기함 定遠號를 중심으로 일자형으로 진격해오는 일본 함대를 V자 기러기대형으로 맞이하였다. 청국전함 10척에 일본해군은 12척으로 함대의 이동속도는 청국이 평균 15.5해리임에 일본은 16.4해리로 빨랐다. 일본해군은 취약해 보이는 북양해군의 우익을 집중공격 청국함대의 대오를 돌파하였다. 丁汝昌이 부상하여 지휘체계가 흔들리자 청국해군은 대혼란에 빠진다. 뤼순(旅順)주둔 청국해군의 지원으로 북양해군은 가까스로 劉公島 기지로 돌아 올 수있었다.
일본은 황해의 제해권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뤼순의 청국해군을 먼저 제압해야 했다. 일본은 그해 11월 뤼순항을 공격 점령하였다. 그러나 북양해군의 본부가 있는 천혜의 요새 劉公島를 정면에서 공격하는 것은 무리가 많았다. 1895년 1.20 미명 일본은 25000명의 육전대를 인근 룽청(榮成)만에 상륙시켜 닷새 후 위하이를 점령하고 劉公島를 배후에서 공격하였다.
고립무원에 빠진 북양해군은 시간이 지날수록 탄약과 군량미가 끝나가고 있었다. 2.11 劉公島를 지키던 59세의 해군사령관 丁汝昌은 자살로 생을 마감하자 劉公島는 드디어 일본군의 수중에 떨어졌다. 북양해군은 일본의 기함 마츠시마(松島)호 함상에서 항복문서에 사인한다.
일본은 청일전쟁의 승리로 요동반도의 할양을 받아냈지만 러시아 독일등 3국간섭에 의해 요동반도를 반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러시아는 대련 뤼순을 조차하여 항구 이름을 “포터 아서”로 바꾸고 러시아 극동함대의 사령부로 만든다. 독일도 삼국간섭의 대가로 산동반도의 교주만(靑島지역)을 조차하여 독일의 극동함대사령부로 만든다. 영국은 1898년 러시아와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劉公島가 있는 위하이를 조차하여 홍콩에 이어 제2 극동함대사령부를 만들었다. 위하이는 “포트 에드워드”로 도시이름이 바뀌고 영국의 식민지로 전락되었다. 그 후 러시아는 러일전쟁의 패배로 대련항을, 독일은 세계제1차대전의 패전으로 교주만을 일본에 넘겨주었지만 영국은 1930년 국민당정부에 위하이를 반환한다. 그러나 劉公島의 영국의 극동함대사령부는 1940년까지 계속되었다.
서양인에게는 포트 에드워드로 많이 알려진 위하이시는 현재 인구 300만의 거대도시이면서 유네스코가 지정한 사람이 살기 좋은 도시의 하나가 되었다. 위하이는 거리상 한국과 가장 가까운 중국도시로 한중수교 2년전인 1990년부터 인천과 페리가 다녔다. 한때 일본이 점령하였고 그후 영국의 식민지였던 위하이시는 이제 외국인으로서는 한국인이 가장 많이 거주한다. 도시 중심지에 코리아타운(韓國城)과 함께 한글 간판이 많이 눈에 뜨이며 우리말 “빨리빨리”는 위하이語가 된지가 오래라고 한다.

유주열 전 베이징총영사=yuzuyoul@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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