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웃음소리 나는 옥탑방 침입해 증오 살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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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지난달 7일 오후 6시쯤. 서울 양천구 신정동의 다세대 주택 3층 옥탑방에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이 소리는 이 집 맞은편에 있는 놀이터에 앉아 혼자 막걸리를 마시고 있던 30대 남성에게도 들렸다. 잠시 후 자리에서 일어난 그는 웃음소리가 나온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임모(42)씨의 네 식구가 사는 옥탑방 문은 열려 있었다. 남성은 양손에 둔기와 흉기를 든 채로 거실로 침입했다. 두 자녀와 함께 TV를 보던 장모(42·여)씨가 낯선 남자의 모습에 놀라 고개를 돌리는 순간 그는 둔기로 장씨의 머리를 내리쳤다. 장씨의 비명을 들은 남편 임씨가 방에서 뛰어나오자 흉기로 임씨의 양 옆구리를 찔렀다. 임씨의 딸(14)과 아들(11)이 지켜보는 앞에서였다. 남성이 달아난 뒤 임씨는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이날 숨졌다.

양천경찰서는 지난 11일 윤모(33)씨를 이 사건의 용의자로 붙잡아 범행 사실을 확인하고 살인 및 살인미수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고 12일 밝혔다. 경찰에 따르면 윤씨는 강도·강간죄로 14년6월을 복역하고 지난 5월 출소한 뒤 공사현장 등에서 일용직 노동을 해왔다. 범행 당일 그는 새벽 인력시장에 나갔으나 일거리가 없어 양천구 일대를 12시간 배회하다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밝혀졌다.

윤씨는 “전과자에 대한 사회의 시선이 싫었다. 취직이 안돼 힘들었는데 집에서 흘러나오는 웃음소리를 듣고 내 처지와 다른 사람들의 행복이 너무 비교돼 순간적으로 분노했다”고 범행 이유를 밝혔다. 경찰은 “임씨 가족도 부부가 맞벌이를 하며 월세로 사는 등 형편이 어려웠다”며 “TV 오락 프로그램을 보고 웃은 게 어이없게도 ‘증오 범죄’의 빌미를 제공한 것”이라고 말했다.

경찰은 사건 발생 직후 범인이 현장에 떨어뜨리고 간 모자와 둔기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맡겨 용의자의 DNA를 확보했으며 방범용 폐쇄회로TV(CCTV)를 분석해 용의자 모습을 찾아냈다. 경찰은 11일 오후 탐문 수사를 벌이던 중 신월동 길거리에서 범행 당일 입었던 검은색 상의와 운동화를 착용한 윤씨를 발견해 긴급 체포했다.

심서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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