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인소년들 억울한 옥살이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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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1989년 4월 맨해튼 센트럴 파크에서 발생한 조깅 여성 강간·폭행사건의 범인으로 기소돼 형기를 마친 5명은 이 범죄와 아무 관련이 없기에 기소를 기각한다."

지난 19일 뉴욕주 대법원의 찰스 테제다 판사가 판결문을 낭독하자 법정은 술렁였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막상 판결이 떨어지자 뉴욕 경찰(NYPD)은 낯을 들지 못했다.

사건은 13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센트럴 파크에서 조깅을 하던 28세의 백인 여성이 강간 및 폭행을 당해 의식불명인 채로 발견됐다. 경찰은 수소문 끝에 흑인 및 히스패닉 청소년 5명(14∼16세)을 체포했다. 이들은 줄기차게 무죄를 주장했지만 경찰은 듣지 않았다.

경찰은 이들로부터 범행을 시인하는 진술을 받아내 감옥에 집어 넣었다. 사건은 흑백 문제로 비화하면서 당시 온 미국을 들끓게 했다. 법정에서 변호사들은 5명의 자백이 위협적인 상황에서 나왔으며 내용도 서로 엇갈린다고 주장했으나 먹혀들지 않았다. 결국 5명은 5년반에서 13년까지 형을 다 살고 나왔다. 이걸로 사건은 역사의 뒤안길에 묻히는 듯했다.

그런데 갑자기 올 초 강간 및 살인죄로 옥살이를 하고 있던 31세의 수감자가 자신이 진범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는 엉뚱한 젊은이들이 자신의 죄를 뒤집어 쓴 것을 괴로워 해왔다고 말했다. 지난달 이 수감자의 DNA를 검사한 결과 당시 피해자의 몸에서 발견된 체액과 일치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결정적 증거가 나온 셈이다.

그런데도 뉴욕 경찰은 그럴 리 없다고 버텼다. 현장을 보면 결코 단독범행이 아니라는 것이다. 경찰은 어떻게든 재판을 늦추려 했지만 뉴욕주 대법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뉴욕 경찰은 진술만을 토대로 피의자를 범인으로 몰아간 치명적 잘못을 저지른 꼴이 됐다.

맨해튼의 한 투자은행에 다니던 백인 여성이 흑인 부랑자들에게 참혹하게 당했다는 사건에 여론이 비등하자 수사 당국은 서둘러 사건을 해결하고 싶었을 것이다. 피의자의 자백 외에는 증거가 없는데도 이들에게 유죄를 선고한 법정의 분위기 또한 그러했을 것이다.

뒤집힌 판결을 지켜보면서 미국 사회에 도사리고 있는 흑백 인종차별과 갈등의 깊은 병을 느끼게 된다.

simsb@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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