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6면

'밤이 깊었다. 그녀는 찬장에서 그릇들을 꺼내 가지런히 식기세척기에 넣는다. 그리고 찬장에 들어가 잠을 청한다. 오늘도 그녀의 침실은 찬장이다.'

1년 전 영국 이코노미스트지에 실린 성탄 특집 기사의 일부다. '행복의 인류학'이라는 제목으로, 홍콩에서 가정부로 일하는 필리핀 여성들을 통해 행복의 진정한 의미를 묻는 내용이었다.

기사에 따르면 14만명 가량의 필리핀 여성이 홍콩에서 가정부로 일하고 있다. 이들 중 절반은 대학을 나와 결혼을 했지만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바다를 건너왔다. 고생은 말도 못한다. 절반 이상이 비좁은 홍콩 아파트의 욕실이나 부엌, 심지어 찬장에서 새우잠을 잔다. 사소한 실수라도 주인에게 얻어맞기 일쑤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들은 '행복'을 느낀다. 그냥 느끼는 정도가 아니라 세계 최고 수준이다. 기사는 마닐라의 필리핀대 조사자료를 인용, 이들이 아시아나 서구 어느나라 국민보다 스스로 행복하다고 느낀다고 쓰고 있다. 한 필리핀 가정부는 말한다. "나는 월급 4백달러를 받지만 행복하다. 그러나 연봉 1백만달러가 넘는 내 주인은 행복하지 않다. "

왜 그럴까. 이코노미스트는 필리핀 토속어인 타갈로그어로 '카프와(kapwa)'라는 개념에 주목한다. 우리말로 '더불어 살기'나 '남을 위해 살기'에 해당하는 말이라고 한다. 이들은 비록 가난하지만 고통도 즐거움도 함께 나누는 '카프와'를 통해 행복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이런 '행복의 인류학'이 과연 필리핀 사람들만의 몫일까. 우리에게도 비슷한 과거가 있었다. 지난날 수많은 한국인들이 광원·간호사·병사·기능공 등으로 타국에 나가 가족을 먹여살렸다. 수많은 딸들이 '찬장'이나 다름없는 벌집에서 청춘을 보냈다. 고통스러운 나날이었다. 그러나 그때 우리는 가난한 만큼 불행했던가.

그동안 소득이 늘고 생활수준은 몰라보게 높아졌다. 그러나 우리는 부유해진 만큼 행복해진 것일까. 만약 우리가 홍콩의 필리핀 가정부들만큼 행복하지 못하다면 이유는 무엇일까. 혹시 가족·이웃과 더불어 살아가는 '카프와'를 잊었기 때문은 아닐까. 기독교 신자이건 아니건, 크리스마스 이브를 맞아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손병수 중앙일보 포브스 대표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