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의 지배 안되고 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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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여러 나라의 민주화 현황을 다룬 글을 읽다가 한 대목에서 눈을 멈췄다.

"근래 민주화 과정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는 나라의 수는 거의 1백개에 이른다. 이 가운데 민주주의가 성공적으로 작동돼 가는 길로 분명히 들어섰거나 또는 적어도 어느 정도 민주적 발전을 이루고 계속해서 민주화가 증진되는 과정에 있는 나라는 적은 수에 불과하다. 아마도 20개 국가에 미치지 못할 것이다. 그 주도적 그룹은 주로 중부 유럽과 발틱 지역의 국가들, 폴란드·헝가리·체코·에스토니아·슬로베니아 등에서 찾아볼 수 있다. 남미와 동아시아에도 그런 몇 나라가 있는 데 대표적으로 칠레·우루과이·대만을 들 수 있다. 발전 정도가 적긴 하지만 여전히 진전하고 있는 국가로는 슬로바키아·루마니아·불가리아·멕시코·브라질·가나·필리핀, 그리고 한국이 있다." (토머스 캐로더스, 『민주화 이행(移行) 패러다임의 종말』·2002)

이 글에서 한국의 민주화 성적을 대만보다 못한 듯이 얘기한 근거는 밝혀져 있지 않다. 그 점은 어떻든, 한 외국 연구자의 눈에 한국 민주화의 발전 정도가 일등급에 못 미치는 것으로 비춰졌다면 우리 나름대로 그 까닭을 생각해 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1987년 시민 항쟁 이래 우리의 민주화가 상당한 성과를 이루어 온 것은 사실이다. 국민의 기본적 인권을 침해하는 여러 악법들이 개폐됐고 한 정당에서 다른 정당에로의 평화적 정권교체도 경험했다. 그럼에도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 결정적으로 뒤처져있는 부분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인가. 그것을 한 마디로 뭉뚱그려 말한다면 바로 법의 지배가 안되고 있다는 점이다.

법의 지배는 사람의 지배와 대립된다. 사람의 지배란 곧 자의(恣意)에 의한 지배를 가리키며 그런 뜻에서 법의 지배는 자의적 지배를 부정하는 원리다. 법의 지배가 되기 위한 기본 요건은 법 집행이 공정해야 한다는 데에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국가기관 자신부터 평등하게 법 적용을 받아야한다는 점이다. 이 점에서 법의 지배는 법을 지배 도구로 삼을 뿐인 법에 의한 지배(rule by law)와는 전혀 다르다. 이처럼 법의 지배의 핵심은 권력의 자의를 통제한다는 데 있다.

법의 지배가 얼마나 실현됐는지를 재는 척도로 흔히 사법권 독립 여부를 든다. 법원을 통해 최종적인 법적 판단이 이루어진다는 점에서 거기에는 타당한 근거가 있다. 그러나 우리의 경우 사법권 독립 여부에 앞서 더 의미있는 잣대가 되는 것은 검찰권 행사의 공정성 여부다. 우리의 검찰은 어느 민주국가보다 강력한 권한을 갖는다. 기소 여부에 대해 독점적이고 재량적인 권한을 행사하며 검찰수사는 곧 실질적 처벌의 의미를 갖는다. 검찰권의 정치적 중립성이라는 기준에서 볼 때 지금까지의 민주화 과정에서 과연 어떤 의미있는 변화를 찾아볼 수 있었는가. 특히 김대중 정부 아래서 상황이 더 악화됐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검찰권 총수인 검찰총장 등 지도부가 줄줄이 구속되고 탄핵 대상으로 지목된 것은 전례없는 일이었다. 이 점 하나만 보더라도 법의 지배라는 평가 항목에서는 낙제점이다.

대통령 선거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무엇을 기준으로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다음 대통령이 가장 신경 써야 할 분야로 경제를 꼽고 있다.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경제를 위해서도 법의 지배가 필수적이라는 점이다. 시장경제를 적자생존의 정글로 표현하기도 하지만 그것은 잘못된 비유다. 시장경제는 신뢰와 예측가능성 없이 성공할 수 없고 그 밑받침이 되는 것이 법의 지배다.

이제 막을 내리는 김대중 정부가 출범하면서 내세운 것은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였다. 구호는 옳았지만 그러나 그것을 실현할 토대가 되는 법의 지배 정착에는 실패했다. 내일 선거에서 누가 당선되느냐에 따라 법치 실현의 성패에 차이를 가져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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