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P의 초라한 선택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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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3김 정치의 퇴장은 대선의 두드러진 현상 중 하나다. 김대중(DJ)대통령은 중립을 외치면서 대선 현장과 거리를 두었다. 대선 흐름을 요동치게 했던 반미 시위를 방치했다는 논란은 있었지만 DJ의 중립자세는 외견상 양호하다. 그와 비슷하게 김영삼(YS) 전 대통령의 체취도 현장에서 사라졌다. YS가 이회창 후보를 지원한다는 발표는 있었지만 금세 관심권에서 멀어졌다. 이 같은 쇠락은 과거의 화려한 영향력과 비교하면 허망할 정도다.

반면 3김 중 대선 현장에 유일하게 남은 자민련 김종필(JP)총재의 곡예정치는 여전하다. 그의 중립 선언은 선거 막판의 혼전 판세에 미묘한 변수로 등장했다. 탄복할만한 노회함이다. 그렇지만 그 행태는 3김 정치의 마지막 장면이 당당하기를 바라는 다수 국민에겐 불만스럽다. 중립이 고뇌에 찬 결단으로 평가를 받지 못한 탓이다. 끝없는 눈치보기와 역겨운 타산의 결과로 비춰지기 때문일 것이다.

JP는 "한나라당은 대통령 자격이 없고, 급진 좌익세력도 대통령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한다. 그는 자민련 의원을 빼간 한나라당을 비난하고, 국민의 뜻도 묻지 않고 수도 이전을 공약한 것은 잘못이라며 민주당도 공격한다. 그의 양비론은 정치적 생존을 위한 고육지책일 것이다. 대선 후 새 정치지형을 염두에 둔 절묘한 판단일 수 있다.

그러나 대선은 무엇인가. 북핵과 반미, 수도 이전 등으로 격렬한 공방이 계속되는 대선에 국가적 장래, 국민적 운명이 달려 있다. 때문에 대선에 담긴 무게와 긴장감을 생각하면 그의 선택에는 정계 원로의 의연함, 정치 지도자의 용기를 찾기 힘들다. 손해 보지 않으려는 상황 회피적 처신이라는 지적을 받을 만하다. '보수의 대부'로 자처했던 기개를 어디서도 찾을 수 없다. 40여년 전 5·16이란 '거사'를 한 뒤 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JP다. 그런 그가 "여기도 저기도 못마땅하니 중립을 지킨다"고 하는 것은 3김 정치의 마지막을 초라하고 왜소하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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