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니스트]피아노 치는 독신녀 男제자와 뒤틀린 사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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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면

'피아니스트'는 기묘하게 뒤틀린 러브 스토리다. 이 영화는 얼굴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사랑에 빠진 남녀의 기초 문법을 따르길 거부한다. 줄거리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면 피아노 교사(여자)와 제자(남자)의 사랑이지만 이들은 서로를 감싸안으려 하지 않는다. 영화가 끝날 때조차 이들의 사랑이 진짜 사랑이었던 건지, 우리가 아는 그 사랑이 맞는지 의아하게 만든다. 이 영화는 관객에게 스스로 '사랑이 무엇이냐' 라는 근원적 질문을 다시 던지게 하는, 묘하고 독특한 향취를 지니고 있다.

'피아니스트'의 여주인공 에리카(이자벨 위페르)는 지금까지 수도 없이 나왔던 러브 스토리의 주인공 중에서 가장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고 해도 과장이 아닐 듯싶다. 에리카는 오랜 세월 자신 안에 숨어 있는 성적 본능이라는 '괴물'을 다스리는 데 익숙해진 중년 독신 여성이다.

그녀와 엄마의 관계도 범상치 않다. 마흔이 넘었지만 에리카는 엄마와 한 침대를 쓴다. 이들은 별것 아닌 일로도 서로 따귀를 올려붙이며 싸우다가 금방 눈물을 글썽이며 화해한다. 딸을 피아니스트로 키웠다는 자부심에 사는 엄마는 에리카의 귀가 시간까지 일일이 간섭한다.

모녀의 관계에서 암시되는 에리카의 정신적 미(未)발육은 그녀가 성욕을 해결하는 모습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그녀는 자동차 극장에 세워진 차들 사이를 걸어다니며 타인의 섹스를 엿보고, 포르노숍에서 비디오를 관람하다 다른 사람이 버린 정액 묻은 휴지의 냄새를 맡는다. 자신의 성기를 면도날로 자해하기도 한다. 심지어 연하의 제자 월터(브누아 마지멜)와 화장실에서 첫 관계를 갖는 순간에도 그녀는 자신이 보는 앞에서 수음 할 것을 명령한다.

지나칠 정도로 엄격하고 냉정한 그녀가 순간순간 드러내는 하이드적인 면모는 독신 여성에 대한 편견을 심어주지 않을까 의심될 만큼 리얼하며 충격적이다. 동시에 사랑이 주는 넉넉한 여유를 맛보지 못하고 명령과 복종의 관계로 몰아가는 불행한 여인의 뒷모습이 안쓰럽게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이 영화는 얄미울 정도로 감정의 범람을 자제했다. 이런 비정상적인 요소들을 영화 속에 흐르는 슈베르트의 소나타처럼 차분하고 냉정하게 배치한 점이 돋보인다.

에리카가 월터에게 연정을 느끼는 과정은 남자의 연주를 듣는 여자의 표정 변화를 클로즈업하는 걸로 대신한다. 위페르는 입술 한 구석을 약간 꿈틀거리고,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펴는 등의 섬세한 연기로 독신 여성의 일그러진 초상을 완성도 높게 연기해낸다.

혹 이 영화가 불편하고, 또 불쾌하기까지 했다면 그건 전적으로 감독 탓일지 모른다. 한 가족을 잔인하게 살해하고 나중에는 관객한테까지 조롱의 미소를 던지는 불량배들을 주인공으로 한 '퍼니 게임'(1997년)의 미하엘 하네케가 이 '슬프고 미친 사랑'의 주모자다. 독일 작가 엘프리데 옐리네크의 원작 소설 『피아노 치는 여자』(문학동네)도 그 불편함에서 영화보다 더하면 더했지 모자라지 않는다. '피아니스트'는 지난해 칸 영화제에서 2등상 격인 심사위원 대상과 남녀 주연상을 받은 명성에 결코 떨어지지 않는 독특한 영화다. 20일 개봉. 18세 이상 관람가.

기선민 기자 murph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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