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안뛰면 진다" 비상령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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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후보는 5일 오후 경기 군포 유세를 마치고 화성으로 이동하면서 김영일(金榮馹)선대본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날 중앙당엔 들르지 않고 바로 길거리 유세를 시작한 李후보는 수행 중인 당직자들로부터 최근의 대선 흐름에 대한 보고를 받고 金본부장을 찾은 것이다.

李후보에게 보고된 판세는 "아직도 노무현(盧武鉉)후보에게 밀리고 있다. 격차가 줄어드는 추세지만 예상과는 달리 확 좁히지는 못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李후보는 金본부장에게 원인 분석과 대책 마련을 지시했다고 한다. "모두들 열심히 한다"는 말도 했다고 한다.

이에 따라 한나라당에는 비상이 걸렸다. 그동안 '단일화 바람'을 "일주일도 못갈 거품"이라며 과소평가했던 당직자들의 표정도 달라졌다. 전략적 실수를 자인하는 얘기들도 나오기 시작했다.

무엇보다 盧후보와 민주당을 흠집내기 위한 비방전략, 즉 네거티브 전략이 문제로 지적되고 있다.

한나라당은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이후 "국가정보원이 도청했다"며 두차례에 걸쳐 관련 문건을 공개했다. 그리곤 盧후보의 재산은닉 의혹과 동아건설 주가조작 방조 의혹을 제기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큰 재미는 보지 못했다는 게 한나라당이 내린 결론이다.

선대위 관계자들은 "도청 의혹의 경우 '설사 사실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국정원의 잘못이지, 盧후보와는 무관하다'는 여론이 강하게 일어 盧후보에게 직접적인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고 말한다. 도청과 관련한 제3차 폭로는 하지 않기로 한 것도 이 때문이다.

盧후보의 재산은닉 의혹 제기도 李후보에 대한 盧후보 측의 강력한 반격만 초래했을 뿐 여론의 반향을 일으키는 데 실패했다는 게 다수 당직자의 견해다.

한나라당은 홍보전에서도 밀리고 있다고 인정한다. 민주당의 '자갈치 아지매' 방송연설이나 '盧후보의 눈물'이란 TV광고에 대해선 "졌다"는 반응이다. 서청원(徐淸源)대표가 5일 박원홍(朴源弘)홍보위원장에게 "홍보전에서 터닝 포인트(전환점)를 찾으라"고 말했다. 하지만 "담당자의 두뇌구조가 다른데 갑자기 톡톡 튀는 아이디어를 내놓는 것은 무리"라는 지적도 뒤따른다.

그래서 "이젠 밤잠 안자고 뛰는 수밖에 없다"(南景弼대변인)는 얘기가 나온다. 金본부장이 이날 서울·경기·인천지역 시·도지부장을 긴급히 불러 "조직을 풀가동하라"고 주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李후보는 5일 일정을 바꿔 대전에서 하룻밤을 자고, 6일 지방 균형발전을 위한 공약을 제시할 예정이다. "충청권도 안심할 수 없다"는 위기의식 때문이다. 그동안 李후보의 당선을 의심하지 않았던 한나라당 당직자들에게선 지금 "안 뛰면 진다"는 말들이 나오기 시작했다.

이상일 기자

lees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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