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고생 독후감 인터넷서 베끼고 짜깁기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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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3면

"독후감 수상작을 선정하는 작업은 심사(審査)라기보다 수사(搜査)라고 할 정도로 힘겨운 일이었습니다. "

최근 독서를 장려하기 위해 전국 고교생을 대상으로 '제4회 독서대상'을 개최한 경주 위덕대의 심사위원 교수 여섯명의 한결같은 반응이다.

공모작품들이 인터넷 상의 독후감·수행평가 사이트 등에서 베끼거나 짜깁기한 글이 대부분이어서 순수 창작품을 찾느라 골머리를 앓았기 때문이다. 심사위원장인 진창영(陳昌永·47·국문학 전공) 교수는 "심사는 정보의 바다로 불리는 인터넷이 결코 인간에게 유익하기만 한 자원의 보고는 아니라는 사실을 재확인시켜준 과정이었다"고 말했다.

한마디로 인터넷이 학생들의 창작성을 크게 훼손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지난 10월 한달간 전국 36개 고교에서 응모한 독후감은 총 1천10편. 심사위원들은 이 중 '우수하다'고 인정되는 작품 1백편을 골라냈다. 이들 작품을 놓고 심사위원들은 다시 2,3차에 걸친 윤독(輪讀·돌려읽기) 과정을 거쳐야 했다. 베끼기·짜깁기 혐의가 짙은 작품들이 많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다.

이 과정에는 도서관 직원 다섯명도 동원됐다. 이들은 무려 사흘 동안 유료인 인터넷 독후감·수행평가 사이트에 들어가 공모작품과 유사한 글들을 찾아내는 확인·대조 작업을 벌였다. 대조 결과 최종심에 오른 1백편의 독후감 가운데 10여편은 인터넷 사이트에서 1백% 내려받은 것으로 드러났고, 나머지 응모작 가운데 50% 가량도 여러 대목을 짜깁기 한 것으로 확인됐다.

교수들은 특히 공모 작품 수가 비슷했던 지난해 대회 때보다 베끼기·짜깁기 정도가 더욱 심해진 사실에 혀를 내둘렀다.

심사위원인 이정옥(46·국문학 전공) 교수는 "전체 1천10편 중 베끼기·짜깁기를 하지 않은 순수 창작품은 5% 정도에 불과한 것으로 조사됐다"고 말했다. 이처럼 베끼기·짜깁기까지 하면서 응모하는 학생이 많은 것은 독후감 공모대회에서 입상할 경우 입시 때 수상 경력을 인정해주는 대학들이 많기 때문이다.

K고교 국어교사 高모(31·여)씨는 "책을 읽지 않고 독후감만으로 점수를 얻으려는 학생들이 갈수록 늘고 있다"며 수행평가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특히 모 고교의 경우 학교 측이 수행평가용 독후감 과제로 제출받은 독후감 7백편을 그대로 이번 공모전에 제출했을 정도다. 이에 심사위원들은 결국 최우수작 없이 상당 부분이 창작한 것으로 인정되는 29개 작품을 우수·가작·입선작으로 선정했다.

심사위원장인 陳교수는 "베끼거나 교묘히 짜깁기한 작품을 발견했을 때 허탈감과 함께 인간 양심에 대한 배신감이 느껴졌다"고 말했다. 위덕대는 짜깁기와 베끼기 난립을 막기 위해 내년부터는 분야별로 읽어야 할 책을 제시한 뒤 대회를 치르기로 했다.

경주=황선윤 기자

suyohw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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