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大選 인신공격 판칠까 걱정"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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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3면

오늘(27일)부터 대통령선거 기간에 들어간다. 비로소 한나라당 이회창(李會昌)-민주당 노무현(盧武鉉)후보란 대진표도 짜였다. 31년만의 양강(兩强)대결이다 보니 양측 간 극한 대결로 선거판이 달아오르고 있다. 불과 22일 뒤인 다음달 19일 자정 무렵이면 16대 대통령이 누구인지 드러난다. 심판은 중앙선관위다. 여기서 잔뼈가 굵은 임좌순(任左淳)사무총장을 만나 얘기를 들어봤다.

任총장은 대뜸 '권위와 신뢰'란 말부터 꺼냈다.

"대통령후보 중 한 명은 대통령이 될 겁니다. 앞으로 5년간 국가원수로 일할 분이죠. 그런 분들에게 선거기간 중 입에 담지 못할 비방으로 상처를 주는 게 과연 국가 장래를 위해 바람직한가, 다 잘 살려고 선거하고 민주주의하는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선거가 오히려 국가발전의 걸림돌이 돼선 안 되죠.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거나 권위를 잃게 해선 안 됩니다."

사실 돈·조직 선거는 과거만큼 문제가 아니라고 했다. 그만큼 후보자들이 법을 지키려는 의식이 강해졌기 때문이라고 한다. 정말 큰 문제는 '네거티브 캠페인'이다. 실제 최근 각당은 주된 선거전략을 네거티브에 맞추고 있다. 지난 6·13 지방선거보다 훨씬 심할 것이란 게 선관위의 전망이다.

그래서 선관위는 후보 비방에 대해 과거와 달리 신속하고도 적극적인 조치를 취한다는 내부 방침을 세웠다고 한다.

"비방성 주장이 나오면 주장한 측에 소명을 요구할 것입니다. 기간을 길게 줄 수 없겠죠. 소명을 못하거나 근거 없는 주장임이 밝혀지면 고발하거나 사법적 책임을 물을 것입니다. 아무렇게나 말하는 풍토를 없애야 합니다."

어차피 사법적 책임을 묻기까지 시간이 걸려 대선기간을 넘길 우려가 크다고 지적하자,"압니다. 그러나 우리의 조치로 발언 자체가 문제가 있다는 것을 국민에게 알릴 수 있습니다. 발언에 현혹되지 않도록 하는 것이지요"라고 했다. 선관위 주변에선 어쩌면 양당 대변인들이 주된 타깃이 될 수도 있다는 관측이 나왔다. 누구보다 앞장서서 비난성 논평을 쏟아내는 탓이다. 그는 일부 후보가 상대 후보에게 비방성 발언을 하는 것도 우려했다. 주로 참모진을 상대로 "후보자를 범법자로 만들지 말고, 후보자에게 위법하지 말라고 하라"고 집중 안내한다고 했다.

최근 후보 단일화를 위한 TV토론 허용문제, 노사모·창사랑 등 사조직 폐쇄,대학내 부재자투표소 설치 등 현안에서 선관위의 결정이 도전받고 있기 때문일까. 그의 말은 곧 정치권에 대한 충고로 옮아갔다.

"경기가 멋있게 되려면 선수는 선수대로 심판은 심판대로, 관중은 관중대로, 페어플레이를 해야 합니다. 월드컵이 성공적으로 끝나고 박수받은 것은 경기 수준도 높았지만 심판 권위에 대한 부정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선관위는 선거란 경기의 심판입니다. 그런데 심판의 권위를 실추시켜 자기 선거운동의 방법으로 삼으려는 게 보입니다. 상당히 심각한 문제입니다. 권위를 인정하지도, 우리 얘기를 들어보지도 않습니다."

선관위 공격에 앞장선 정치권에 대한 서운한 감정도 감추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 아직은 정치권력이 가장 셉니다. 정치는 대화와 타협이지만 선거에는 대화와 타협없이 오로지 충돌만 있습니다. 선관위가 그런 힘이 센 집단 간 싸움에서 심판을 보려면 정도(正道)로 갈 수밖에 없습니다. 정당성을 확보하지 않는 한 살아남을 수 없다는 것을 체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정치현실은 내 편 아니면 적입니다. 중립지대를 인정해주지 않죠. 선관위가 자기 편을 들어준다고 여기면 좋다고 하고 남의 편을 들어준다고 여기면 눈치보고 중립성을 훼손했다고 합니다."

일부 사조직이 선관위의 조치에 반발했던 것에 대해서도 우려했다. 사조직은 정당정치란 제도를 부인하는 것이며 일부 자발적 지지 모임에 대해선 바람직한 방향이어서 지난 2년간 위법을 최소화하려고 노력을 기울였으나 법의 선을 넘어섰다고 판단했다고 한다.

"이들 사조직은 후보나 정당도 법의 테두리 때문에 하지 못하는 것을 하게 해 달라고 합니다. 안됩니다. 또 존재 자체가 불법이라면 거기에 종속되는 홈페이지도 같은 운명일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런 사이트가 불법 선거운동을 지시하고, 결과를 올리고,특정후보를 비방하는 내용상의 문제도 문제지만 존재할 수 없는 조직의 홈페이지인데 단체는 없어지고 홈페이지는 살리는 게 맞겠습니까. 하려면 개인적으로 27일부터 하라는 것입니다."

그는 할 얘기가 많은 사람이었다. 유권자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사실 후보자나 정당은 선거결과에 명운을 건 사람이니까 참으라고 하는 것은 무리일 수 있습니다. (유권자들이)잠깐 감정적으로 투표하는 것을 참으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갈비탕, 잠깐 참으면 됩니다. 차 한잔도 잠깐 참으면 됩니다.진정 어떤 사람에게 나라를 맡기면 좋으냐, 진짜 배우자를 고르듯, 기업이라면 사원을 뽑듯 한다면 아무렇게나 하겠습니까. 국회의원선거나 지방선거완 다릅니다. 신중하게 생각해주십시오."

이렇듯 많은 비판을 쏟아낸 그지만 끝엔 우리 선거문화가 나아지고 있다고 했다. 최근 정당 정책광고만 봐도 예전엔 온통 욕설과 비방이었지만 지금은 모두 정책광고라고 했다. 조금만 더 노력을 기울이면 선진선거로 갈 것이라고도 했다. 대선 뒤엔 초등학교부터 대학교, 농·축협 선거 등 선거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올바른 선거문화가 뿌리내리도록 애쓸 것이란 얘기도 했다.

그에게 마지막으로 물었다."지지할 후보를 정했냐"고 했다."허허"웃었다.

고정애 기자

ockh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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