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57>제104화두더지인생...발굴40년:12.부산동삼동패총(2)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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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졸업논문 작성을 위한 대학 시절 마지막 발굴로 부천 신앙촌의 쓰레기장을 파헤친 데 이어 사회에 첫발을 내딛고 처음 참가한 발굴조사가 선사시대의 쓰레기터인 패총(貝塚)발굴이었다. 쓰레기장과는 전생에 무슨 깊은 인연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일제시대 일본인들에 의해 실체가 처음 드러난 동삼동 패총은 광복 후에도 외국인의 손을 먼저 탔다. 국립박물관이 1969년 본격 발굴을 하기에 앞서 63년 미국인 모아(A.Mohr)가 시굴조사했던 것이다. 국내 첫 신석기 유적 발굴의 의미를 외국인들이 먼저 인정하지 않았나 싶다. 당시만 해도 외국인들에 의한 국내 유적 조사를 별 거부감 없이 받아들이던 시절이었다.

모아는 재미있는 경력의 소유자였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한참 지난 40대에 고고학에 관심을 갖게 돼 위스콘신대학교 박사 과정에 입학해 선사시대 연구에 몰두했다. 박사학위 논문 주제로 우리나라 선사시대를 택한 것도 흥미롭다. 부인도 고고학에 흥미를 느껴 부부가 함께 고고학을 공부했다. 말하자면 '부부 발굴단'이었던 셈이다.

부부는 미국 과학재단에 연구 장학금을 신청해 당시로는 엄청난 거금인 2만달러의 연구비를 지원받았고, 62년 동삼동 패총에 대한 1차 답사를 위해 한국을 찾았다. 일본을 통해 동삼동 패총에 대한 사전 정보를 얻은 뒤 확인차 방문했던 것이다. 모아는 먼저 당시 국립박물관 김재원(金載元)관장을 찾아가 한국 방문의 목적을 설명하고 발굴조사를 할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했다.

김관장은 국내 유적의 외국인 단독 발굴은 허용되지 않으니 공동 발굴 형식을 취하는 것이 좋겠다고 충고하고 부부를 서울대 문리대 고고인류학과 김원룡(金元龍)교수에게 소개했다. 부부의 사정을 들어주고 도움을 줄 수 있을거란 생각에서였다. 국내 유적에 대한 외국인 단독 발굴이 불가능했던 것은 그해 정월 문화재보호법이 제정되면서 본격적인 문화재 보호정책이 마련된 결과였다.

보호법에 따라 문화재가 매장돼 있는 유적 발굴은 문화재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발굴조사 전에 반드시 허가를 받아야 가능했다. 김관장과 김원룡 교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였다. 김관장은 61년 서울대 문리대의 고고인류학과 개설을 주도한 분이었다. 김원룡 교수는 당시 박물관에 근무하다 고고인류학과 개설과 함께 주임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말하자면 국립박물관의 분신처럼 고고인류학과가 문리대에 개설된 것이다.

마침 김원룡 교수는 모아 부부의 스승과 미국 유학시절 친분이 있었다. 때문에 큰 거부감 없이 부부를 맞았고 이듬해인 63년 부부가 다시 한국을 찾았을 때 아예 자신의 연구실 한쪽에 책상을 놓을 수 있는 자리를 내줘 머리를 맞대고 지내게 됐다. 부부는 마침내 11월 자신들의 박사학위 연구 주제인 동삼동 신석기 패총을 시굴조사했다.

뒤늦게 알게 됐지만 정작 이 부부의 발굴은 사전에 조사허가를 받지 않았다. 아마 법 절차를 밟는 것에 익숙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김원룡 교수는 당시 3학년 학생들 가운데 영어로 어느 정도 의사소통이 가능한 임효재(任孝宰) 현 서울대학교 고고미술사학과 교수와 정영화(鄭永和) 현 영남대학교 교수를 발굴 현장에 보내 부부를 돕도록 배려했다. 미국인들의 선진 조사기법을 배우게 하려는 계산도 있었다.

정영화 교수의 말을 빌리면 모아 부부를 따라 패총이 있는 동삼동 바닷가에 도착해 보니 해변 언덕에 조개껍데기만 하얗게 널려 있을 뿐 사람이 사는 집이라고는 패총 근처에 다 쓰러져 가는 민가 한채가 전부였다. 민가의 주인은 평소 낚시로 소일하는 노인이었는데 발굴이 시작되자 현장에서 작업을 구경하는 것으로 소일거리를 바꾸었다고 한다.

지금 유적 주변은 온통 횟집 등이 들어서 번화가로 완전히 모습이 바뀌었다. 안내판이 없으면 패총을 찾기 힘들 정도로 주변 환경이 변해버린 것이다.

정리=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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