룰라號 '룰루랄라' 할 시간 없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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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2면

"브라질이 단호하게 왼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27일 대통령선거 결선투표에서 노동자당의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후보의 당선이 확정되자 미국의 뉴욕 타임스는 이렇게 기사의 서두를 장식했다. 60% 이상의 유권자가 좌파 정당을 민 데다 두 후보 간 표 차이가 역대 선거사상 가장 컸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브라질의 첫 좌파 정권이니, 남미에 다시 사회주의 바람이 부는 것이 아니냐는 일부의 우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이날 밤 브라질 주요 도시에선 한판의 잔치가 벌어졌다. 상파울루 최대 번화가인 8차로의 파울리스타 거리는 축하 인파로 넘쳐났다. 젊은이들은 맥주를 손에 들고 삼바춤을 추면서 룰라를 연호했고, 화려한 불꽃놀이는 밤하늘을 환하게 밝혔다.

그러나 룰라로서는 오랫동안 승리감에 취해 있을 시간이 없다. 새 정권은 내년 초 출범하지만 대통령 당선자로서 그는 원치 않는 선물을 이미 한아름 받아들었기 때문이다. 실업자 증가와 빈부격차 확대, 늘어나는 범죄와 눈덩이 외채, 통화(헤알)가치와 주가의 폭락 등이 그런 것들이다.

자칫하면 "노동자당도, 룰라도 별 수 없다"는 실망만 안겨줄 수 있다. 다행히 시민들의 판단은 매우 현실적이었다. 대형 경마장에 마련된 기표소에서 만난 40대 초반의 마우로 베팅은 "룰라가 대통령이 된다고 뭐가 얼마나 달라지겠느냐. 그의 당선은 그저 작은 변화의 시작일 뿐"이라고 했다.

4년 재임기간 중 일자리를 8백만∼1천만개 창출하고, 한달 최저임금(현재 1백80헤알, 약 48달러)을 두배로 올리겠다는 룰라의 공약에 대해서도 액면 그대로 믿는 이들은 없다고 말했다. 정치인들의 빈말에 체념이 누적된 냄새가 물씬 났다.

한눈에 중산층으로 보이는 30대 중반의 여성에게 다가가 룰라에게 당부하고픈 걸 하나만 꼽아보라고 주문했다. "날로 기승을 부리는 범죄부터 다스려야 합니다." 그녀는 "이 도시에 사는 사람 가운데 열에 여덟은 신호대기 중인 차 안에서 노상강도에게 돈을 털린 경험이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과의 관계정립도 숙제다. 브라질 내에 은근히 넓게 퍼져 있는 반미(反美)감정이 자신의 좌파성향에 많은 기대를 걸 경우 양국관계가 묘하게 발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운동가 출신인 그의 등장에 대해 해외 투자자들과 브라질 내 중산층은 적이 불안해 했지만 그는 현 정권이 추진해온 경제정책을 대부분 그대로 유지하겠다고 거듭 강조함으로써 이들의 불안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릴 수 있었다.

하지만 기득권층의 반감이나 우려를 깨끗이 씻어내는 일은 쉽지 않아 보인다. "지금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룰라는 골수 좌파였다. 지난 25년 동안 그는 파업과 그 놈의 정치밖에 한 게 없다. 배운 것도 없다. 그런 사람에게 나라를 맡겨도 되는지 걱정이다." 자식을 모두 출가시키고 난 노부부가 지키기엔 너무 넓어 보이는 한 가정을 방문했을 때 66세의 안주인은 이렇게 말했다.

"이번 선거가 신음하는 사람들을 위한 헌신이 되길 바란다." 투표를 마치고 나오면서 룰라가 한 이 말이 이런 우려를 또 부추겼을까. 어쨌든 그의 최대 관건은 어떻게 이념 시비를 극복하고 시장의 신뢰를 얻느냐는 것이라고 월가(街)의 전문가들은 지적한다. 현재 안고 있는 문제들이 모두 경제난에서 비롯된 것이고, 이걸 해결하려면 해외든 국내든 시장의 도움이 절대 필요하기 때문이다.

simsb@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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