日 부실정리 표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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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5면

일본 정부가 추진해온 부실정리 계획이 정치권의 반발에 부닥쳐 표류하고 있다.

다케나카 헤이조(竹中平藏)금융상 겸 경제재정상이 이끄는 '금융대책 처리 프로젝트팀'이 마련한 한국식의 고강도 부실채권 정리계획을 집권 여당인 자민당이 극력 반대하고 나섰기 때문이다.

다케나카 금융상은 23일 건전성이 취약한 은행에 대한 국유화 조치와 부실기업의 퇴출 등을 골자로 한 부실채권 처리에 관한 중간보고서를 공표할 예정이었으나 '정치적 이유'를 들어 발표 시기를 무기 연기했다.

이 보고서는 이미 21일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총리가 재가한 것이나 22일 내용이 알려지면서 자민당에서 "너무 과격하다"는 비판이 제기됐다.

특히 고이즈미 총리와 자민당 간의 가교 역할을 해왔던 아오키 미키오(靑木幹雄)의원은 이날 다케나카 금융상을 겨냥해 "민간인 출신에게 경제를 모두 맡겨놨다가 거덜나면 누가 책임질 것이냐"며 고이즈미 정부의 경제정책을 강도높게 비난했다.

일본 언론들은 이번 발표 연기 사태로 고이즈미호(號)의 경제개혁 구상이 난파할지 모른다는 우려를 제기했다.

이날 닛케이 평균주가는 지난주의 상승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다시 하락세로 돌아서 8,700선이 무너졌다.

한편 정리대상인 일본 은행들의 반발도 만만치 않다.

일본 은행들은 "부실채권을 정리하면 추가로 65만명이 일자리를 잃을 것"이라며 정부의 고강도 부실정리계획의 부작용을 강조했다.

은행들은 또 세금환급분에 해당하는 금액을 자본으로 계상하는 이른바 '세(稅)효과 회계방식'을 인정하지 않기로 한 개정방침을 재고해 주도록 요청할 계획이다.

정부안대로 회계방식을 고치면 대부분의 대형 은행들이 국제결제은행(BIS)기준 자기자본비율을 맞추지 못하게 된다는 주장이다. 국제금융계에서는 일본 정부의 개혁의지와 추진력에 대한 의문도 제기되고 있다.

사사키 다케시 도쿄대 총장은 "지방선거 후에도 여당이 다케나카의 개혁구상에 계속 반대한다면 심각한 상황이 초래될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일부에서는 또 정치권의 반대를 무마하기 위해 개혁조치의 수위가 낮아질 것으로 예상한다.

이 경우 개혁의 효과가 반감되면서 '일본병'의 조기치유가 물건너 갈 수도 있다는 관측이다.

이가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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