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궁'에 빠진 최초의 추리소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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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8면

한국 최초의 추리소설을 어떤 작품으로 볼 것이냐를 두고 논쟁이 일 조짐이다. 계간 미스터리(발행인 이상우) 가을호가 『혈가사』(血袈裟)를 실으며 "한국 최초 장편추리소설 특종 발굴"이라 홍보한 데 대해<본보 10월 16일자 17면 보도>반론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한국 근대 탐정소설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문학평론가 조성면씨는 이미 이해조가 1908년에 정탐소설(偵探小說)『쌍옥적』(雙玉笛)을 발표했다며 혈가사를 최초의 추리소설로 보는 것은 잘못이라 주장한다.

그는 두 소설 모두 영웅적 탐정이 미궁에 빠진 범죄사건을 논리적으로 풀어가는 추리소설의 얼개를 갖추고 있다고 본다. 따라서 발표 연도가 앞선 『쌍옥적』이 한국 추리소설의 효시란 이야기다. 더우기 혈가사 출간 이전에도 "비록 아동물이지만 방정환 선생이 추리형식의 『동생을 찾으러』(1925년), 『칠칠단의 비밀』(1926년)을 북극성이란 필명으로 발표한 바 있다"고 그는 '『혈가사』효시론'을 비판한다.

이에 대해 국립중앙도서관에서 혈가사를 찾아낸 이수광 계간 미스터리 주간은 "박병호가 1926년에 출간한 혈가사는 표지에 탐정소설임이 명시되어 있다"며 "『쌍옥적』은 포교가 사건해결의 주역이며 문장도 신소설투여서 백성의 억울한 일을 관가에서 해결해 주는 전래의 공안(公案)소설에 가깝다"고 주장했다. 그에 따르면 그간 우리나라 최초의 추리소설로 인정됐던 채만식의 『염마』(1934년 작)보다 8년 앞선만큼 혈가사를 첫 창작추리소설로 보기에 무리가 없다는 것이다.

조박사도 『혈가사』가 『쌍옥적』에 비해 추리소설에 한 걸음 더 접근해 있다는 점은 동의한다. 사건 발단 장소가 서울 남산공원이며, 변호사·응접실·고등 문관시험 등이 나와 서구 근대문학 형식이란 본래의 추리소설 성격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쌍옥적』 역시 경인선 철도에서 돈가방이 사라지고 기찰포교의 사건 해결에 고소사란 여인이 도움을 주는 점에 비추어 계몽성이나 개인 역할의 증대 등 추리소설이 갖추어야 할 덕목을 갖추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형식면에서 신소설(新小說)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은 두 소설 모두 마찬가지라는 것도 '『쌍옥적』 효시론'의 근거다.

또한 조박사는 『혈가사』의 중앙도서관 소장은 이미 알려졌던 사실이라며 복사본을 제시, 첫 발굴이란 계간 미스터리측의 발표에 의문을 제기했다. 이에 대해선 이 주간도 "울산 동구청의 홈페이지의 혈가사 설명을 보고 수소문한 끝에 작품을 발굴했다"고 밝혀 작품의 존재는 어느 정도 알려져 있었음을 시사했다.

이와 관련 문학평론가인 고봉수씨는 "아직 『혈가사』를 보지 못해 뭐라 할 수는 없지만 『쌍옥적』은 전통적인 공안소설에 가깝다고 본다"면서 "한국 창작추리문학의 기원을 서구문학의 도입과 관련지어 충분히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조심스런 입장을 밝혔다.

그간 대중의 사랑을 받으면서도 학문 연구에서 소외되어 온 추리소설에 대해 학계에서 본격적인 논의가 있기를 기대한다.

김성희 기자

jaeja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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